양산천·서낙동강·맥도강·평강천·함안천(양산·부산·김해·함안)

한국의 강둑길 68 (마지막회)
양산천·서낙동강·맥도강·평강천·함안천(양산·부산·김해·함안)
서낙동강을 아시나요, 낙동강 1300리의 본류였던

서낙동강은 부산, 김해 사람이나 아는 강이다. 낙동강의 지류가 아니다. 천리를 넘게 흘러온 낙동강이 삼각주를 만들고 마지막 구비를 돌아 바다 품에 안기는 원래의 물줄기가 서낙동강이다. 영남알프스를 떠난 양산천의 물도 이미 물금에서 한 몸 되고 대저수문에서 서낙동강이 된다. 그 사이 평강천과 맥도강을 낳고 을숙도를 감싸 안은 채 갈잎의 합창 속에 남해 큰 바다의 식구가 된다

 

이제 겨울이다. 아직 늦가을이 어슬렁거리지만 겨울색이 입혀지기 시작했다. 살아 움직이는 것들이 꼼지락거리기를 늦추거나 동면에 드는 계절에 인간의 시계는 한 해를 마감한다. 이 열두 토막의 마지막 달에 <한국의 강둑길> 여행의 장정도 마감이 설계되어 있다.
국가하천 가운데서 마지막 남은 꼬맹이 강, 그러나 만만치 않은 이 다섯 개의 강을 묶어서 겨울 추위가 오기 전에 김장을 하듯 버무리고 땅을 판다.
 

통도사에서 출발하는 양산천. 영남알프스의 남쪽 고봉인 영축산 줄기가 멀리 보인다(양산 하북)
낙동강에 안기기 직전 호포교 근처에 오면 강둑은 육상트랙처럼 보인다(양산 동면)

 

영남알프스의 기를 받은 양산천
영남알프스 고봉 군(群)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자리 잡은 영축산은 남쪽으로 물길을 내 양산천을 만든다. 그 아래서 만나는 통도사는 예사 절이 아니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자 해인·송광과 함께 대한민국 3보 사찰이다. 그래서 대웅전에 불상을 모시지 않는다. 조계종15교구 본사이니 승가사회의 힘 또한 굳건하다. 올해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등록된 7개 사찰에 통도사 자장암이 들어 있다.
정작 통도사가 들어선 골짜기는 본디 앞뒤로 폭이 좁고 솔아서, 가람배치가 중앙에 집중된 형태다. 기어이 자장암 언저리까지 올라가서 자전거를 타고 강물을 따라가는 것은, 사람도 가고 자동차도 통과하는 숲길을 ‘자전거만 못간다’고 막고 있는 승가의 뜻을 거역하고 싶기도 해서다.
비좁은 계곡은 산문을 벗어나서도 그러해 용연천을 만나는 삼감교 부근까지는 강둑길을 아예 만들지도 못하고 내려간다. 그나마 자전거길은 지방도에 첨부물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상북면까지 이어진다.

천성산이 가로 막고, 영축산 잔봉이 가로막고
동쪽은 내원사를 품고 있는 천성산(812m)이 가로막고, 서쪽은 염수봉(816m)과 고만고만한 영남알프스의 여맥이 버티고 있으니 양산 골짜기는 더 옹색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상북면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천성산은 형님격인 원효산(922m)을 젖히고 온 국민들에게 알려진 산이다(지금은 원효산이 천성산으로, 원래 천성산은 천성산2봉으로 불린다). 승려 지율의 이름도 ‘천성산 도롱뇽’과 함께 널리 알려졌다. 지율의 단식투쟁은 파장이 컸다.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길다는 KTX 원효터널(13.28km) 공사는 중단과 재개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서울-부산 2시간대의 ‘축지시대’를 열었다. 누구는 지율이 걱정하던 도롱뇽이 여전히 잘 살고 있다고도 하고, 누구는 그건 종자가 다른 것이라는 설까지 분분하다. 자신의 과오가 부풀려 명예가 손상되었다고 소송을 걸어 승소한 지율의 이름은 영주댐이 내성천의 금모래를 집어삼켜 버렸다는 ‘환경운동’의 테마 속에 살아있다. 누가 맞는지는 알기 어려우나 그가 스스로의 신념에 투철한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짧은 강이니 벌써 양산시내다. 인구 35만의 양산은 소속은 경상남도지만 산 너머 아래위 동네 부산과 울산에 가깝다. 김해를 마주하고 있으나 낙동강이 막고 있고, 밀양이 북쪽이지만 역시 강과 산이 가로막고 있다. KBS도 부산방송이 관할이고, 법원도 울산지법에 속해 있다. 구포면을 동래군에, 대저면을 김해군에 떼어 주었다가 1973년 동래군이 폐지되자 부산외곽인 기장·일광 장안·서생·정관·철마를 넘겨받아 여전히 수도권 밖에서 압도적인 인구증가 1위 도시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16년 경주지진에 이은 포항지진으로 그 원인이 ‘양산단층’의 지각변동과 불안으로 알려지자, 부정적인 이미지가 드리워진다고 시민들이 속상해 하지만 어디 남의 나라 땅 이름을 갖다 붙일 수도 없지 않겠는가. 그러고 보니 ‘양산단층’, 이 비좁은 느낌의 골짜기를 헤집고 페달을 밟은 것이다. 이제야 강둑을 정비하는 작업이 한창인 것을 보면 국가하천으로서는 뒤늦기는 했으나 다행이다.

 

김해공항 확장조감도. 신설 활주로 방향을 튼다 해도 김해나 강서구 주민들이 소음으로부터 해방되기는 틀렸다
추색이 덜 벗겨진 통도사. 아름다운 한국의 산사, 적멸보궁 중의 하나다(양산 하북)
양산천은 통도사를 빼놓고는 이렇다하게 내세울만한 게 없다(양산 하북)
강둑과 하상이 이제야 정비되고 있는 양산천(양산 상북)
폐차장 풍경에서 정육점 쇼윈도가 생각난 것은 웬일일까(양산 상북)

 

서낙동강이 낙동강의 진짜 본류였다
호포교에서 낙동강물이 된 양산천과는 작별인사를 나눈다. 대동화명대교를 건너면 김해 대동이다. 부산 강서구와 경계다. 서낙동강이 거기 대저수문에서 시작된다. 서낙동강은 부산, 김해 사람이나 아는 이름이다. 낙동강의 본류가 서낙동강이었다는 사실은 더더욱 그렇다. 일제는 치수사업의 일환으로 서낙동강에 대저수문을 만들고 오늘날 낙동강본류로 물길을 돌리려 하상을 팠다. 이른바 ‘하천직정화(河川直正化)’ 작업이다. 바로 운하를 판 것이다.
1300리 낙동강이 수많은 지류를 거느리고 있지만 서낙동강은 낙동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엄연한 본류다. 낙동강과 서낙동강의 가랑이 사이로 퇴적된 삼각주가 바로 부산 강서구 땅이다. 거대한 공간에 김해공항이 들어서 있고, 부산 언저리 강마을의 삶이 오래 이어져 온 터전이다.    서낙동강은 김해경전철이 지나가는 불암역까지는 강둑길이 이어지다 끊어지기를 반복한다. 강동교를 지나 내려오면 남해고속도로 제2지선 아래 ‘둔치도’로 자전거길이 이어진다. 조만강과 서낙동강 사이의 퇴적이 만든 이 섬은 1990년대 부산시 연료단지로 석탄저탄장을 만들다 아이러니하게도 연탄수요가 급감되면서 살아남았다. 뜻있는 부산시민 3500명이 10여 년 전부터 ‘100만평 시민공원만들기’를 목표로 월 2000원씩 모아 1만3500평(4만4297㎡)을 샀다. ‘착한 알박기’를 한 셈이다. 세월이 흘러 그린벨트도 해제되고 땅값이 올라, 남이섬처럼 강우현이 만든 ‘나미나라공화국’ 같은 꿈나라를 만들어볼까 하던 뜻도 강물처럼 흘러간 듯하다.
강서경찰서쪽에서 이제 서낙동강이 품은 삼각주 속의 지류 평강천과 맥도강으로 향한다. 이름도 낯선 이 강을 가야하는 이유는 오로지 조무래기 ‘국가하천’이기 때문이다. 이 강이 국가하천인 이유는 홍수와 관련이 있다. ‘보리밭섬’인 맥도(麥島)에 흐르는 강물은 거의 고인물이나 진배 없다. 김해공항에 바짝 붙어 있어 유도등 끄트머리는 바로 호수 같은 강물이다.
잠시 지나가는 데도 몇 분 간격으로 뜨고 내리는 비행기 소음으로 귀가 멍멍한데 평생을 살아가야하는 강마을 사람들의 고충은 오죽하겠는가. 강둑이랄 것도 없다. 이렇게 지면과 거의 평행으로 달리는 강물은 처음 본다. 강 유역면적(6.21㎢)이 강의 길이(11.60km) 보다 수치가 적은 국가하천은 맥도강이 유일하다.
보리섬강을 한 바퀴 돌아 평강천으로 접어든다. ‘평강(平江)’이란 말에도 강둑이 들어설 여지가 없으니 길도 제대로 나있을 리 없다. 야심차게 그려놓은 개발청사진에는 번듯한 도로가 사통팔달이나 현실의 길은 좁은 농로뿐이다. 이어지다 끊어지기를 반복하는 길은 강물 옆으로 다가갈 듯 하다 다시 자전거를 안으로 밀어 넣는다. 도시근교농업의 오리지널을 본다. 깻잎도 상추도 하우스 안에서 자란다. 그 유명한 대저 토마토 ‘짭짜리’의 고향이 바로 여기다. 도시의 팽창은 삼각주를 농촌으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공업도시 부산이니 간단한 볼트와 너트 공장에서부터 다양한 부품공장과 물류창고가 뒤범벅이 되어있다.
길을 잃어버려 큰길로 나오니 ‘해수원탕 24시 온천’이 손짓한다. 땅속에서 바다 짠물이 나온다는 이야기다. 김해김씨 시조 가락국 수로왕의 아내이자 김해허씨의 시조인 황후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이 김해이니 그 때엔 이 넓은 삼각주가 옛 김해만 바다이자 국제무역 항구였다.

 

호수처럼 고용한 맥도강 위로 김해공항에 내려앉는 여객기(부산 강서)
대저수문에서 바라본 서낙동강. 물살이 거세게 쏟아져 나간다(부산 강서)
평강천도 몸피는 제법 커서 강의 테가 절로 난다(부산 강서)
도시근교농업이 평강천 유역에서 이루어져 부산과 김해 사람들 밥상을 책임진다(부산 강서)

 

다시 불붙은 영남권 신공항 건설과 김해공항
이륙하는 비행기는 이내 고도를 높여 신어산 방향으로 멀어져간다. ‘영남권신공항’ 문제는 지난 정부의 뜨거운 감자였으나 ‘김해공항확장안’으로 종결되었다. 정부가 바뀌자 ‘동남권 100년 공항건설’이라는 이름으로 이른바 부·울·경(부산·울산·경남)이 합세했다. 5조9700억이 드는 김해공항 확장을 하느니 가덕도에 신공항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대구공항 이전비 7조2500억과 김해공항 확장비용을 합하면 가덕도 신공항 건설이 가능하다는 주판알도 이미 튕겨 보았다.
김해공항 근처의 임호산, 경운산이 비행에 방해되어 깎아내야 하니 환경훼손은 불가피하다고 덧붙인다. 무엇보다 ‘가덕도안’이 설득력을 얻는 부분은 ‘24시간 이·착륙 가능한 국제공항’이라는 점이다. 밤 10시 이후 새벽까지 이착륙이 금지되는 공항은 확장해도 어차피 절름발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대구사람들의 반발이다. 주무관청인 국토교통부까지 “김해공항확장계획을 재검토하겠다”고 발표한 마당이니 또 한 번 시끄러울 것은 불 보듯 하다.

을숙도 100년과 김정한의 소설 <모래톱이야기>
서낙동강의 끄트머리 명지의 동쪽에 있는 을숙도 이야기도 빼놓고 지나갈 수는 없다. 을숙도의 가을풍경, 갈대숲 사이로 난 물길과 둘레길 풍경은 시인묵객의 노스텔지어를 자아내게 만들었다. 사실 을숙도는 1861년 대동여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100년 남짓한 젊은 섬이다. 원래 일제 때 경부선 건설은 낙동강 서쪽 김해, 명지를 경유해서 강을 건너 하단, 구덕터널, 부산역으로 노선을 계획했으나 낙동강 물동량이 없어질 것을 우려한 하단 객주들의 반대로 구포를 지나도록 수정되었다.
1987년 일웅도와 을숙도는 합쳐져 백만 평의 땅이 되었다. 일웅이와 을숙이가 결혼했다고 말하는 스토리텔러도 있다. 원래 부산사람들의 걱정은 을숙도의 오염과 맞닿아 있다. 부산사람들은 안다. 하단가락타운아파트 뒤쪽에 50m 남짓한 하단 똥다리와 똥배가 건너가는 종착지가 을숙도 분뇨처리장이던 시절을. 배설의 종착지는 위에 뜨는 상등수와 찌꺼기가 모인 하등수로 냄새에 찌들었다. 자연여과방식에 의존하던 시절은 1992년까지 이어졌다.
그래도 을숙도는 <낙동강파수꾼> 김정한이 26년 절필 후  쓴  소설 <모래톱이야기>에서 더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준다. 조막만한 섬이라는 ‘조마이섬’의 농민 건우할아버지와 며느리, 손자의 이야기다. 삶의 텃밭을 지키려는 순박한 사람들의 목숨을 건 몸부림의 기록이자 지리적 공간을 최대한 활용한 상상력의 걸작이라는 찬사가 김정한의 문학 이력에 붙어 다닌다.
시조 두 편을  읊조리고 지나가자.
  

세월도 낙동강 따라 칠백리길 흘러와서/ 마지막 바다 가까운 하구에선 지쳤던가/ 을숙도 갈배밭 베고 질펀히도 누워있네
백발이 갈대처럼 서걱이는 노사공도/ 강물만 강이 아니라 하루해도 강이라며/ 김해벌 막막히 저무는 또 하나의 강을 보데  (정완영의 <을숙도>) 

 

몇 분 간격으로 뜨고 내리는 항공기 소음으로 평생 고통 받는 주민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부산 강서)
이내 평온한 호수의 모습을 한 서낙동강은 둔치도를 만나기까지 몇 개의 지류를 더 거느린 엄연한 본류다(부산 강서)
서낙동강 건너로 본 일출. 부산쪽이 붉게 물들어 장엄하다(이수철 제공사진, 부산 강서)
‘24시 해수원탕 온천’이 있다는 건 바다가 땅속에서 잠자고 있다는 증거다(부산 강서)

 

6·25전쟁 낙동강방어선의 처절한 혈투
다음날 아침 일찍이 함안으로 간다. 한국의 강둑길 여정의 마지막 강, 함안천이다. 발원지는 함안 남쪽 여항산(743m) 연봉인 서북산(738m)이다. 정북방을 향하는 이른바 ‘역수(逆水)’라 반란의 기운이 흐르는 물로 여겨왔다. 이 불길한 풍수를 비보(裨補)하기 위하여 남쪽의 높은 산을 배가 드나드는 여항산(艅航山, 토속지명은 ‘배넘이산’)이라 하고, 북쪽 남강 합수머리에 평야지대임에도 대산(大山)이라는 지명을 붙였다고 전해 내려온다.
초겨울의 문턱인데도 단풍이 생생한 별천계곡에서 출발한다. 문화 해설사 강재오 씨와 함안 사람인 옛 동료 이규준 씨가 동행하여 호화군단(?)을 이룬 마무리 여정이다. 이내 ‘6·25격전함안민안비’가 막아선다. 함안은 낙동강방어선의 제일 하단으로 치열한 격전지였다. 미군 25사단과 인민군 6사단이 치열한 격전을 벌인 곳이다. 전사에 등장하는 ‘마산북서부전투’다.
민안비라는 이름은 어쩌면 피아(彼我)도 넘어선 진혼의 씻김굿 같은 징표다. 난리통에 죽은 군인과 양민의 숫자를 거론하는 것은 차라리 부질없다.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죽었는지 김해 쪽으로 피난을 갔다 돌아온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죽어 널브러진 시체가 흡사 멸치포대를 이고 가다가 땅바닥에 떨어트려 길바닥에 흩어진 멸치 같았다.”고 했을까. 끝내 여항산을 빼앗기지 않은 그 전과는 6·25전쟁사에 피로 얼룩져 기록된다. 미군이 얼마나 고전했으면 ‘갓댐(God damn!)이라고 머리를 흔들었을까. 지금도 이곳 사람들은 여항산을 ‘갓데미산’이라고 부른다.

 

서북산 아래 별천계곡에서 함안천이 시작된다(함안 여항)
6·25 격전의 현장에서 모두를 위로하는 진혼이 민안비에 담긴 뜻이다(함안 여항)
함안은 강둑길이 337km나 되는, 자전거 타기에 딱 좋은 곳이다. 두런두런 어깨를 맞대고 가는 길은 얼마나 편안한가

 

1000기의 고분과 아라가야의 옛 도읍 함안
가야읍에 함안의 영광을 빼앗긴 구읍 함안면은 점촌에 문경시의 이름을 빼앗긴 문경읍과 비슷한 처지다. 하지만 2000년 가까운 옛날로 되돌아가보면 함안의 본거는 오늘날 대형 고분군이 밀집한 가야읍이다. 서기 3세기 경 고만고만한 해안가 부족 8개 국가가 연합하여 함안을 침공해 왔는데 오히려 함안에게 크게 패하자 함안은 ‘아라가야’로 더욱 번성한다.
마산 서부에서 진주까지를 장악하며 번성하던 아라가야도 559년 멸망하여 고령의 대가야에 복속되었다가 결국은 신라에 통합되고 만다. 함안 전역에는 72군데의 고분군이 있다. 대형고분군도 42군데인데다, 산성만 해도 15개나 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웬만한 구릉은 모두 고분인 셈이다. 1000여기 가운데 대부분은 일제 때 도굴꾼의 손을 탔고, 더러 손이 못 미친 곳은 최근에도 발굴을 이어가고 있으니 ‘보배 함안’이다.
가야읍내를 외곽으로 돌면서 강둑길 여정을 이어간다. 지류인 신음천은 강둑길 중간에 바닥으로 내려서 잠수교를 건너야 한다. 쇄석이 깔린 길을 뒤뚱거리며 가기도 하고, 매끈한 마사토 강둑길을 기분 좋게 달리기도 한다. 함안은 과연 강둑길의 군이다. 무려 337km에 이른다. 함안천이 22km에 불과하면서도 국가하천인 이유는 역시 남강으로 이어진 물줄기로 인한 범람 탓이다.   
함안 법수는 상습홍수지역에 해당한다. 예부터 “메기가 침만 뱉어도 홍수가 진다.”는 저습지여서 제방을 쌓는 일이 다급했다. 홍수가 지면 법수, 대산의 수박농사도 그야말로 ‘한방에 훅’ 가게 되는 셈이다. 또 하나 함안 사람들이 면적이 넓다고 자랑하는 것은 “1개 군에 고속도로 인터체인지가 5개나 되는 곳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말한다. 한때 잘나가던 이 지역출신의 한국도로공사 사장의 특별한 배려였다고 믿고 있다.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강둑길을 음미하다보니 <처녀뱃사공> 노래비다. 작사가 윤부길이 윤항기, 복희 남매의 아버지라는 사실은 꽤나 알려진 이야기다. 하루 종일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가 나오는 천등산 고개처럼 떠들썩하지도 않다. 노래비 하나를 빼곤 어떤 조형물도 없는 단출함이 함안에서 여기저기 보이는 호국의 비석처럼 경건하다. 군인 간 오라비의 소식을 기다리며 노를 젓던 처녀들도 이젠 아흔을 바라보는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있거나 세상을 버렸을 것이다.
악양루에 올라 바라보는 남강이 비안개에 젖어 흐른다. 중국 땅 동정호(洞庭湖, 퉁팅호) 모화(慕華)의 흔적이 남은 이름 ‘악양(岳陽)’은 하동 평사리에서도 만나지 않았던가. 본디 지니고 있던 이름 ‘기두헌’ 현판이 사라지고 청남 오제봉이 쓴 ‘악양루’ 현판만 남아 있다고 여기저기 해설하지만 틀린 말씀이다. 사람 하나 간신히 들어설 수 있는 북쪽 벼랑 난간에서 올려다보면 ‘의두헌(倚斗軒)’ 현판이 외롭게 걸려 있다. 틀린 답안지를 베껴 쓴 쌍둥이 딸처럼 누가 한번 잘못 내다 뿌린 정보의 생명은 생각보다 질기다. 세상도 백내장 탓인가 시계(視界)가 흐리다. 강 건너 의령 땅도 초겨울 비에 젖어 어슬어슬 춥다. 
 

가야읍의 신음천을 잠수교로 건너야 다시 함안천과 합류한다(함안 가야)
처녀뱃사공노래비’, 그 처녀도 이젠 아흔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되어 있겠지(함안 대산)

 

‘한국의 강둑길’, 6년 연재를 마치며
6년은 짧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6년은 참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산하, 한국의 강을 다시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여름 장마 물살에 떠내려 갈 뻔도 하고, 눈밭에 미끄러지기도 하며 국가하천 63개를 자전거로 기행 했습니다. 애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덕분에 68회(2013. 4 ~ 2018. 12)에 걸쳐 한 회도 건너뛰지 않고 마칠 수 있게 되어 감회가 새롭습니다.
우리 땅에는 산과 들 사이사이를  수많은 강이 오늘도 흘러갑니다. 북녘을 제외하고도 63개의 국가하천과 3775개의 지방하천이 있으며, 소하천은 무려 2만5천여개나 됩니다.
거기에 사람이 살고, 물류가 오가고, 역사가 있고, 풍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탈것의 발달과 다리의 건설로 강을 오가는 배는 거의 사라진 풍경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도 자전거를 타고 강둑을 가면서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에 넋이 나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우리보다 먼저 살다 간 어르신들 이야기도 역사에서 걸어 나옵니다. 오늘을 사는 강마을 사람들의 고단한 이야기가 질펀하게 펼쳐지기도 합니다.
정치적 논란에 휩싸인 4대강의 현장을 직접 보면서 든 수많은 생각, 관료들의 무신경한 방치와 무소신, 그 안타까움이 아직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땅의 강둑길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소통의 공간입니다. 국가하천과 지방하천을 연결하여 조금만 손보면, 조금만 더 관심을 더 기울이면 모세혈관처럼 퍼져 나가는 <자전거대동여지도>를 우리 손으로 완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여백으로 남겨 놓겠습니다. 그간의 성원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조용연 올림

  참고 자료
1. <한국의 발견>, 경상남도, 뿌리깊은나무, 1989
2. <을숙도, 거대한 상실>, 박창희, 페이퍼로드, 2009
3. <가덕도 신공항과 내륙수로>, 박석순, 유투브, 2018
4. 통도사, 천성산, 김해공항 등, 네이버, 나무위키
5. <한국하천일람>, 국토교통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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