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성이 멈춘 격전의 현장을 찾아서(2)

포성이 멈춘 격전의 현장을 찾아서(2)
3일 간의 혈투 ‘춘천・홍천 대첩’  전쟁의 흐름을 바꾸고 나라를 구했다
야심만만하게 쳐내려온 북한군을 맞아 민・관・군이 함께 싸웠던 ‘춘천·홍천에서 3일간의 혈투’, 그리고 그 빛나는 승리! 반면 이곳에서의 고전으로 인해 북한군은 작전계획의 큰 그림이 뒤틀리고 말았다. 이 승리로 국군은 한강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고, 연합군이 추후 낙동강방어선을 구축하는 토대가 되었다. 결국 UN군의 참전과 大반격을 가능하게 했다. 신생 대한민국을 누란(累卵)의 위기에서 구한 ‘춘천・홍천지구전투’가 제대로 평가되고 재조명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6·25전쟁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나서 ‘춘천대첩’이라고도 불린다. 인제・홍천축선 전투의 기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대첩’이기에 ‘춘천・홍천대첩’이라고 불러야 더 적합하지 않을까 한다 

 

이달에 ‘포성이 멈춘 격전의 현장’을 찾아서 떠나는 곳은, 6·25전쟁 발발과 함께 무섭게 밀려오던 북한군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주었던 격전의 현장 ‘춘천’과 ‘홍천’이다. 서울에서 가자면, 경춘선(열차)이나 경춘로(46번국도)를 이용하면 한결 여유롭고 운치가 있다. 북한강을 끼고 달리기에 더욱 여행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접근로’이기 때문이다. 수도권 전철과 준고속열차 ‘ITX-청춘’으로 인해 이제는 서울 생활권으로 바짝 다가와 있다. 수도권에서는 요즘과 같이 외부활동이 그리울 때, 지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때 부담 없이 가볍게 갈 수 있는 곳이다. 
과거에 무궁화호 열차나 완행버스를 타고 찾을 때의 낭만은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여전히 대학생들이 MT를 오고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 산과 강, 호수를 묶어 계절을 가리지 않고 사계절 내내 다양한 축제가 열리는 곳이라 더욱 가고 싶은 곳이다. 열차도 좋고 버스도 좋지만, ‘북한강 자전거길’을 따라 나의 힘으로 페달을 밟으며 가는 방법이 제일 멋있지 않을까.

이곳도, 암호명 ‘폭풍’에 따라 북한군이 밀고 내려왔다
6월 25일 04시를 기하여 암호명 ‘폭풍’이 하달되자 38도선 전 전선에서 북한군이 밀고 내려왔다. 전차를 중심으로 증강한 북한군 1군단(주공, 主攻)이 서울의 북쪽 의정부와 서쪽의 문산에서 수도 서울을 향해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을 때, 북한군 2군단(조공. 助攻)은 강원도 ‘춘천·홍천 축선’과 태백산맥 너머 동해안에서 강릉을 향해 밀고 내려왔다. 
북한군 작전의 큰 그림은 개전과 동시에 주력부대인 1군단을 서울 북방에 투입하여 3일 내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조공부대인 2군단으로 하여금 춘천-홍천을 거쳐 수원방향으로 우회·진출하여 국군의 주력을 섬멸하는 것이었다. 이때 한강을 건너온 6사단도 김포반도를 거쳐 영등포방향으로 진출하여 합세하고자 했다.
‘중동부지역작전’은 6·25전쟁 초기인 6월 25일부터 30일까지 6일 간 ‘화천-춘천·가평’ 축선과, ‘인제-홍천’에 이르는 축선에서 있었던 전투다. 북한군 2군단 예하 보병 2·12사단, 고속기동부대인 603모터사이클연대, 38경비 1여단의 공격을 받아 국군 6사단이 춘천·인제·홍천 일대에서 병력은 4배, 화력은 10배 이상 우세한 북한군에 맞서 싸웠다.
전투가 있었던 곳은 험준한 산악과 불규칙한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천 쪽에서 남진해온 북한강, 인제 쪽에서 서남진해 온 소양강이 춘천에서 합류하여 한강으로 흘러가는 지형적 여건은 대체로 방어에 유리한 편이다. 지대 내에 있는 5번 도로(화천-춘천-홍천 연결), 44번 도로(인제-홍천-서울 연결)와 451번 도로(인제-현리-홍천 연결) 등을 비롯해 남·북 방향의 도로는 잘 발달되어 있는 편이지만, 동·서로 횡단하며 남·북의 축선과 연결되는 도로망은 잘 발달되어 있지 않다. 국군이나 북한군 모두 부대들 간의 횡적 연결과 상호 작전 지원 면에서는 불리한 여건이다.

북한군과 군군의 부대 운용
북한군은 크게 두 방향에서 공격해왔다. 제12사단은 북한군 2군단의 주공부대로서 인제에서 홍천방향으로 공격하여 홍천을 점령한 후 원주-여주 간 도로를 차단하고, 603모터사이클연대의 측방을 엄호한 다음 ‘여주-수원방면’으로 진출하여 국군의 퇴로 및 증원을 차단하게 했다. 제2사단은 북한군 2군단의 조공부대로서 화천에서 춘천·가평방향으로 공격해 6월 25일 오전 중에 춘천을 점령한 후 양평을 거쳐 서울 동남쪽으로 진출하려 했다. 이후 의정부축선에서 공격하는 북한군 1군단의 동측방을 엄호하고 국군 증원부대를 차단하게 했다. 603모터사이클연대는 2일차에 홍천지역으로 투입한 후 이천-수원 방향으로 진격하여 한국군 주력의 퇴로와 병참선을 차단하게 했다. 
이러한 북한군에 대항하여 84km의 넓은 방어정면을 책임진 부대는 국군 제6사단이었다. 사단은 7연대를 춘천 정면에, 2연대를 인제 남쪽의 어론리와 현리 정면에 배치하고, 예비 연대인 19연대를 원주 지역에 배치했다. 포병대대는 북한군의 주공이 공격해올 것으로 판단한 춘천 축선에 집중할 수 있도록 춘천에 배치했다.

 

춘천-홍천 축선에서의 전투 상황
제1단계작전은 6월 25일 북한군 2·12사단의 공격을 받아 38도선 상의 ‘최초경계진지’로부터 ‘주저항선’(춘천 정면의 ‘소양강 북단’과 ‘인제-홍천 축선’ 전방 어론리 일대) 사이에서 전개된 작전이다. 제2단계작전은 6월 26~27일에 주저항선으로부터 ‘최후저항선’(소양강 남안과 홍천 북방 ‘말고개’)으로 철수하면서 전개한 작전이다. 제3단계작전은 춘천을 빼앗긴 후, 6월 28~29일 홍천방향으로의 지연전과, ‘말고개’에서 있었던 4차례의 ‘공방전’ 등을 포함하는 작전이다.

① 화천 - 춘천·가평 축선에서의 전투
6월 25일 공격준비 사격이 끝나자, 북한군 2사단은 자주포를 앞세우고 38도선 상의 전방경계부대를 돌파하여 ‘옥산포’로 공격해왔다. 국군은 사단·연대 예비대들을 전방으로 추진하여 북한군의 공세에 강력하게 대응했다. 북한군은 국군의 강력한 포병사격과 반격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고 ‘옥산포-춘천분지’(춘천시 사농동 신매대교 부근)에서 25일 첫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은 첫날, 포병사격과 ‘심일 중위’ 등의 특공조 공격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지만, 무엇보다 춘천을 점령하려던 계획이 무산된 게 제일 큰 치명타였다.
26일이 되자 북한군은 전날의 피해를 만회하기 위해 주저항선에 대해 파상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이에 국군 6사단은 서울을 돌아서 온 예비대(19연대)를 소양강 북쪽 ‘우두산’ 일대로 추진하여 7연대의 방어력을 보강하여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함은 물론 기습공격까지 실시했다. 이로써 북한군은 춘천의 길목인 옥산포 전투에서 궤멸에 가까울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26일 오후에 들어 국군은 북한군의 총공세를 예상하여 소양강 남안 상의 최후저항선을 점령했고, 춘천에 이르는 유일한 접근로인 ‘소양교’를 사이에 두고 공방전을 계속했다.
밤새 치열한 공방전을 치른 다음 날(27일) 11시경, 북한군은 소양강을 도하, 총공세를 감행해왔다. 이때 6사단장은 육본으로부터 서부전선의 붕괴 소식(의정부 함락, 육본의 시흥 철수)과 함께 ‘전선의 균형을 위해 중앙선을 따라 지연전을 실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6사단은 서부 전선과의 단절을 막기 위해 ‘자의(自意)’에 의해 ‘원창고개’를 거쳐 홍천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춘천은 27일 18시경 북한군 2사단에 의해 점령되었다.

춘천지구전적비. 심일 중위와 육탄 5용사가 수류탄과 화염병으로 적 자주포를 공격하던 모습을 형상화했다(춘천 삼천동)

 

② 인제 - 홍천 축선에서의 전투
북한군 주공사단인 12사단이 우세한 화력으로 38도선 상의 전방경계부대를 돌파하여 남진을 계속하자, 6사단 2연대는 자은리(홍천군 두촌면) 일대의 ‘주저항선’으로 이동하면서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려 했으나 전투력의 열세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국군 2연대는 주저항선 상에서 적의 거센 공세를 막지 못한 채 많은 피해를 입자, 26일 오후 들어 최후저항선으로 철수했다. 북한군 12사단은 퇴각하는 국군을 추격하여 ‘말고개’에 대한 공세를 계속했지만 전투력의 열세로 말고개 돌파에는 실패했다(12사단은 예하 31연대를 처음부터 춘천 정면에 투입・운용함으로써 전투력 발휘가 제한되었음). 한편, 현리지역을 경계하던 국군 2연대 3대대는 북한군 1경비여단의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고 ‘철정리’(홍천군 두촌면)로 철수하여 연대와 합류했다.
북한군 12사단은 27일 말고개 방어진지를 돌파하기 위해 하루 종일 공세를 계속했다. 그러나 국군(2연대)은 춘천으로부터 홍천으로 전환 배치된 예비대(19연대)와 포병대대(-)의 지원을 받아, 말고개에서 전개된 4차례의 공방전에서 북한군 12사단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기면서 최후저항선을 지켜냈다.
6월 28일 국군 2연대는 춘천으로부터 증원된 부대들과 함께 말고개 일대에서 북한군 12사단의 최후 공세에 맞서 싸웠다. 이날, 말고개 전투에서 ‘육탄11용사’는 적 자주포 10대를 파괴·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북한군의 공세는 매번 아군의 반격에 의해 저지되다가 6월 30일이 되어서야 홍천을 점령할 수 있었다. 

 

③ 원창고개 및 말고개 전투가 끝나고 나서
6월 27일 18시경 춘천을 점령한 북한군은 ‘원창고개’(춘천 남쪽 9km. 5번 도로)를 통해 홍천으로 퇴각하는 국군(6사단 7연대)에 대한 공격을 북한군 12사단 31연대가 담당케 하고, 북한군 2사단은 서울방향으로 진출하기 시작해 28일 14시경 가평을 점령했다.
홍천의 북쪽 관문인 ‘원문고개’에서 북한군의 전진을 저지하고, 예비연대가 홍천 북방에서 엄호하는 가운데 춘천 쪽의 7연대와 말고개를 사수하던 2연대까지 홍천으로 철수함으로써 6사단 전 부대가 합류할 수 있었다. 모든 부대가 합류한 6사단은 원주를 거쳐서 청주로 철수하며 지연전을 펼쳤다. 이로써 ‘춘천·홍천전투’는 막을 내렸다.

국군 6사단은 북한군의 공세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웠다 
① 춘천지구전투 승리는 공고하게 구축된 민·관·군 협력체계의 결과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격전이 예상되는 요지(要地)와 소양강변 일대에 호(壕)를 파고 철조망을 설치하는 진지공사에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민들까지 팔을 걷고 나서서 군대의 부족한 힘을 보탰다. 이것이 춘천을 지킬 수 있는 큰 버팀목이 되었다. 전쟁이 나고서는, 제사공장(製絲工場) 여직원들이 주먹밥을 지어서 장병들의 허기진 배를 불려 적에 대항하게 해주었고, 포진지 옆 포탄 저장고가 위험에 빠지자 모든 탄약을 지게와 우마차를 이용해 소양강 이남의 안전지대로 이동시켜 지속적으로 포 사격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도 했다. 
춘천·홍천지구 전투에서 경찰이 이룬 전공도 적지 않다. 특히 ‘내평지서’(소양강댐 건설로 수몰됨)에서 있었던 ‘내평전투’는 38도선을 방어하던 국군 부대가 북한군에게 밀려 후퇴할 때 양구 방향에서 진격해오는 북한군을 3시간 정도 지연시켰다. 6·25전쟁 첫 승리인 춘천대첩에 크게 기여한 전투로 평가되고 있다. 이를 기리기 위한 추모상이 소양강댐을 바라보는 공원에 조성되어 있다.  
춘천지역에서의 3일간 전투는 국군만이 잘 싸운 것이 아니라 경찰, 시민, 학생과 청년단원이 함께 싸운 결과다.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돼 결사항전한 춘천대첩은 개전 초기 6·25 전사의 획을 그은 의미 있는 전투로 평가되고 있다. 

 

② 포병부대는 정말 잘 싸웠다. 화력의 중요성이 입증된 전투였다. 
춘천・홍천지구전투에서 국군이 승리한 요인을 얘기할 때 빠트리지 않는 것이 ‘국군 16포병대대의 우수성’이다. 국군이 보유했던 포는 M3계열 105㎜ 곡사포(2차 대전 당시 공수부대용으로 제작된 포. 사거리 6.5km)로서, 같은 구경의 M2계열 곡사포(사거리 11.3km)나 북한군 주력 곡사포 122㎜(사거리 15.4km)에 비하면 성능이 많이 부족했다. 성능의 열세를 피나는 훈련을 통해 보완했던 것이다. 북한군의 집중이 예상되는 주요 접근로・지점에 화력을 집중시키는 훈련을 가혹할 정도로 실시했다. 심지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군의관까지 포술훈련을 시킨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옥산포-춘천분지 전투’에서 북한군에게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가할 수 있었던 기틀을 마련한 것이 16포병대대다. 
그러나 포병운용에서 아쉬운 점도 있었다. 국군은 북한군 주력이 춘천으로 향할 것으로 판단해 포병대대 전부를 춘천 축선에 배치・운용했다. 그래서 옥산포-춘천분지 일대를 공격해온 북한군에 대해 거의 궤멸 수준의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이는 포병의 화력 지원을 전혀 받을 수 없었던 인제-홍천 축선에서는 국군이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북한군 주공이 향한 ‘인제-홍천 축선’에 배치된 2연대는 초기전투에서 단 한 발의 포병 화력 지원도 받을 수 없어 많은 손실을 입었다. 개전 후 34시간이 지난 26일 14시가 되어서야 1개 포대가 전환되자 홍천축선의 부대들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27일에는 1개 포대가 추가로 전환됨으로써 최후저항선인 말고개 전투에서 적시에 화력을 지원해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할 수 있었다.

 

③ 효율적인 예비대 운용도 춘천대첩의 흐름을 가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춘천·홍천지구 전투에서 승인(勝因)을 얘기하면서 ‘효율적인 예비대 운용’을 빼놓을 수 없지만 그간 별로 조명받지 못해왔다. 북한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7연대 예비대대는 소양강 이북의 준비된 주저항선 진지를 점령한 후 북한군의 옥산포-춘천지구 공세를 물리쳐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60km 후방 원주에 위치한 예비연대(19연대)를 춘천 정면으로 투입하는 과정도 매우 극적이었다. 1개 대대는 자체 보유한 차량과 동원한 차량을 이용해 25일 오후에 춘천 정면으로 증원하여 주저항선을 담당한 전방연대를 보강했다. 그러나 나머지 연대( - )는 이동수단이 없어서 열차편으로 서울(청량리)을 돌아 춘천으로 투입되었다. 소양강 북쪽에서 있었던 옥산포전투나 소양강 방어작전 간 북한군을 격퇴·저지하는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철도로 서울 일대를 통과할 즈음은 의정부축선의 포천과 동두천이 북한군에 의해 점령된 후였고, 가용한 부대들을 의정부 축선에 집중 투입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만약 6사단 예비연대의 부대이동 상황을 육군본부가 인지했다면 어떤 조치가 취해졌을지, 또 그 조치가 전쟁의 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는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6사단은 27일, 북한군이 홍천 북방을 위협하자 사단의 퇴로 차단을 우려해 춘천 정면에서 운용 중이던 예비연대(19연대 전체)를 홍천축선으로 전환했다. 홍천축선으로 전환된 예비연대는 이후 북한군 12사단의 말고개 최후저항선 돌파와 홍천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으며, 말고개에서 육탄11용사가 북한군 자주포를 파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국군 6사단의 이러한 예비대 운용은 북한군 12사단이 예비연대 없이 2개 연대만으로 홍천을 공격하면서 융통성이 없었던 것과 큰 대조를 이룬다.

내 한 몸 아끼지 않았던 육탄용사를 생각하면 많이 부끄러워진다
60년대만 해도 6·25전쟁과 관련된 영화가 꽤 많이 제작·상영되었고 많이들 봤다. 6·25전쟁 영화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 중 하나가 ‘화염병’을 들고 맨몸으로 북한군 탱크를 향해 돌진하는 특공용사를 그린 장면이었다. 그런 장면은 실제로 6·25전쟁 초기에 있었고, 이는 장병들의 전투의지 고양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춘천·홍천지구전투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물리치고 국군이 이길 수 있었던 요인 중에서 돌진해오는 적 자주포를 향해 달려갔던 육탄용사의 역할은 절대 가볍게 넘길 수 없다. 육탄공격의 시초는 1949년 5월 개성 ‘송악산’에서 있었던 교전에서 국군 1사단 소속 ‘육탄10용사’가 북한군 진지에 대해 감행한 자폭 공격으로 알려지고 있다. 6·25전쟁이 발발한 그날, 채병덕 총참모장은 의정부축선을 방문했을 때 “포천이 북한군 전차에 의해 진지가 돌파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육박공격으로 적 전차를 저지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춘천·홍천지구전투’에서는 소양강 건너 ‘옥산포’에서 심일 중위외 5명이, 홍천북방 말고개에서도 ‘11인의 돌격대’가 북한군 자주포에 대해 육탄공격을 감행했다. 문산축선에서는 적 전차에 대해 육탄공격이 있었다.
6·25전쟁 중에 있었던 육탄공격은 대전차무기나 포병 사격으로 적 전차·자주포와 보병을 분리시킨 상태에서 특공대가 박격포탄·수류탄·화염병을 이용해 공격하는 방법을 택했다. 육탄공격에 앞서 북한군 전차·자주포의 장·단점과 파괴요령에 대한 교육을 받고 부단한 숙달훈련을 실시하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육탄돌격대를 구성할 때는 ‘자유의사’를 밝힌 지원자들 중에서 가족상황(독자, 결혼여부, 부모 봉양 등)을 고려해서 엄선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말고개 생존자가 전하는 증언 중에 “출전 전날 연대장이 주는 위스키 한 잔과 화랑담배 1개피”에 대한 얘기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유골을 대신할 손톱·발톱과 머리카락을 잘라 하얀 종이에 싸서 제출했다”는 내용을 읽고 생각이 복잡해졌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미군 함정을 공격할 때 마지막으로 택한 전술이 ‘가미카제’다. 앳된 조종사들이 출격하기 전날 천황이 내린 술과 담배로 마지막 의식을 하던 모습을 오래 전 영화를 통해서 본 적이 있다. 영화 속 상황이 아닌 현실에서 자원(自願)하고 나서 출전을 준비하는 동안 특공대원들의 고뇌는 어떠했을까. 필자 역시 40년도 더 된 그때, 임관하기 직전 이유도 제대로 모른 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손톱・발톱과 머리카락’을 제출했던 기억이 난다. 
특공대원들은 육탄공격으로 북한군 전차·자주포를 파괴·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로 인해 춘천과 홍천에서, 문산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큰 공을 세웠던 유공자에 대해서는 훈장과 특진의 영예가 주어졌으나, 나머지 특공대원들에 대한 내용은 전해지고 있지 않다.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옥산포’ 들판과 ‘말고개’ 현장을 가보았다. 그래도 상상하기가 쉽지 않았다. ‘전적비’는 살아있는, 생명력이 있는 ‘안보 교과서’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전적비 앞에만 서면 자꾸 작아지고 부끄러워진다.

춘천·홍천 일원의 자전거여행
남한강 자전거길을 달리다가 경의·중앙선 운길산역에서 시작하는 북한강 자전거길로 접어들어 80km 북동진하면 춘천 신매대교 인증센터에 다다른다. 춘천 일대에 조성된 자전거도로는 의암호 순환로를 비롯해 강촌·소양강 순환로까지 합쳐 약 100km에 달한다고 한다. 경춘선을 이용해 춘천역에 도착해도 의암호 순환 자전거길에 쉽게 진입할 수 있다. 
춘천의 100km 자전거길을 따라서 춘천 일대의 전적지를 둘러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30km 정도 떨어진 홍천과 홍천강을 연계시키는 코스는 또 다른 재미를 더할 수 있다. 홍천으로 가기 위해서는 공지천 자전거길을 따라 춘천IC까지 진출한 다음, 3개의 고개를 넘어야 하지만 그렇게 어렵지 않다(300m 조금 넘는 원창고개·모래재·부사원고개). 
홍천에서 홍천강을 따라 약 15km 올라가면 ‘말고개’가 있고, 60km를 내려오면 청평에서 북한강 자전거길과 합류할 수 있다. 춘천에서 홍천으로 가는 길목에는 ‘강재구소령 기념공원’(홍천군 북방면)도 있다. 1965년 월남전에 맹호부대로 파병하기 위해 훈련하던 중 부하의 실수로 떨어진 수류탄을 안고 산화한 곳이다. 한번 들러서 고인의 영혼을 달래주는 것도 ‘격전의 현장을 찾는 자전거여행’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할게 될 것이다.

 

춘천은 먹거리도 많지만, 둘러볼 거리가 더 많은 곳
경춘선 춘천역에 도착하여 역사를 벗어나면(1번 출구) 도심 한 가운데 예사롭지 않은 넓은 공간을 볼 수 있다. 6·25전쟁이 한창일 때 들어섰던 미군기지 ‘캠프 페이지’(군수품 공급을 위한 비행장)가 2013년에 춘천시에 반환된 곳이다. 현재 남아있는 기지의 흔적은 우뚝 서있는 물탱크와 격납고, 군 막사 1동이 전부다. 이 공간이 세간의 주목을 끈 것은 1983년에 중공 민항기가 이곳에 불시착하면서다. 이 사건을 계기로 6·25전쟁 때 서로 총부리를 겨눴던 중공과 승객・승무원 송환문제를 놓고 마주앉아 교섭을 했고, 나아가서는 한·중 수교의 계기가 된 역사적 현장이다. 
춘천역에서 2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의암호기 나온다. 춘천시는 6·25전쟁 50주년이던 2000년에 근화동 호반순환도로변에 ‘춘천대첩기념 평화공원’을 조성했다. 이때 춘천 일대에서 있었던 11개소 주요 격전지에 대한 안내도(전투에 대한 설명과 작전 요도 포함)를 잘 만들어 놓아 당시 춘천에서 있었던 전투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곳 평화공원에는 6·25전쟁 당시 춘천 일대에서 있었던 민·관·군통합작전의 모습, 학도의용군 기념탑과 무공탑은 물론, 월남전 참전 기념탑도 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서울의 남산처럼 우뚝 솟은 산봉우리, 춘천의 진산(鎭山)인 봉의산(鳳儀山, 302m)이 있다. 당시 6사단 지휘부가 전투를 지휘했던 독전(督戰)의 현장이다. 춘천대첩에 대한 윤곽과 춘천에 대한 이해를 높이려면 우선 이곳에 올라보면 큰 보탬이 된다. 봉의산 아래에는 춘천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소양교를 만날 수 있다. 6·25전쟁 당시 소양강을 건널 수 있던 유일한 교량이어서 이를 확보하기 위해 국군과 북한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는데, 그날의 흔적인 총탄 자국이 교각 여기저기 남아 있다. 
소양교를 건너 북쪽으로 가면 소양강댐 입구에 경찰이 치른 ‘내평전투기념비’가 있고, 우두산 정상에는 ‘충렬탑’이, 의암호 북쪽 신매대교 일대에는 ‘강원경찰 충혼탑’이 세워져있어 춘천지구 전투는 명실공이 민·관·군 통합작전의 본보기임을 보여주고 있다. 
춘천대첩평화공원으로부터 공지천교까지 의암호 변을 잇는 약 2km의 길은 ‘이디오피아길’로 명명되어 있고, 남쪽 끝단에 에티오피아 전통 가옥 양식의 ‘에티오피아군 한국전 참전기념관’이 있다(표기법이 달라졌지만 고유명사여서 이디오피아/에티오피아를 병행표기함). 바로 옆 공지천 조각공원에는 ‘에티오피아군 한국전 참전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또 다른 쪽에는 ‘이디오피아 집’이란 커피전문점·기념관이 있다(1968년 기념비 제막 당시 에티오피아 황제가 직접 참석했다. 에티오피아는 세계 커피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고 그 커피만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전문점이 ‘이디오피아 집’이다.). 
의암호와 춘천 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는 춘천지구전적비와 춘전지구전적기념관이 있다. 춘천지구전적비는 6·25전쟁 첫 대승의 시발점이 된 ‘옥산포전투’ 당시의 심일 중위와 육탄 5용사를 형상화해 1978년에 건립한 것이다. 춘천지구전적기념관에는 6·25전쟁 발발 배경에서부터 춘천지구전투의 전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6·25전쟁 초기 유일하게 승리한 춘천지구전투가 군사적, 한국사적 관점에서 차지하는 의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실증자료뿐만 아니라 재현한 모형, 장비, 동영상 자료 등을 통해서 잘 설명하고 있다. 

 

 

춘천・홍천지구 승전이 미친 영향
국군 6사단이 춘천을 3일간 고수함으로써 북한군 2사단의 한강 이남으로의 기동, 603모터사이클연대의 수원으로의 진출을 저지해 국군 주력을 포위하려던 북한군의 최초계획을 수포로 만들었다. 이로써 국군은 7월 3일까지 한강방어선을 유지할 수 있었고, 미 지상군의 한반도 전개를 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뒤이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여건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래서 6·25전쟁 초기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른 전투로 높이 평가된다. 
6사단은 북한군 2군단의 한반도 중앙(5번도로 ; 춘천-원주-단양-안동-대구) 진출을 저지하고, 전투력을 보존한 상태에서 미군과 함께 지연전을 펼침으로써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서부전선의 붕괴와 수도 서울의 함락이라는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구하는데 큰 역할을 한 대승이었다. 반면, 북한군은 춘천·홍천지구전투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북한군 2군단장과 사단장 2명을 해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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