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산성이 왜 여기에?

지피지기 일본행⑦ 오카야마 
백제 산성이 왜 여기에?  
모모타로 전설과 도깨비성
 

세토내해 중간쯤에서 남면하고 있는 오카야마는 수로와 육로 모두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인구 195만의 중급 현으로 전래 동화인 모모타로(桃太郞) 전설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은 오카야마시 서쪽에 있는 키노조(鬼ノ城)라는 옛날 산성 때문이다. 백제의 산성이 왜 여기 세토내해 깊숙한 곳에 있을까  

오카야마 평야와 세토내해를 바라보는 도깨비성 ‘키노죠’. 입지와 축성 양식 모두 전형적인 백제식 산성이다

 

산요(山陽) 신칸센을 타고 고베(神戶)로 가는 길. 산요는 야마구치에서 오사카까지 혼슈 서쪽의 남쪽지방을 가리킨다. 우리나라에도 산을 기준으로 남쪽을 양, 북쪽에는 음(陰)으로 붙인 지명이 많다. 햇빛이 잘 드는 여부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북쪽의 동해를 면하고 있는 시마네(島根)와 돗토리(鳥取) 지방은 산인(山陰) 지방이라고 한다. 산요신칸센은 후쿠오카에서 오사카를 잇는 644km의 고속철도다.  
오카야마에 내린 것은 시 북서쪽에 자리한 산성 때문이다. 일본은 평지나 낮은 구릉에 축성된 평지성이 많은 나라다. 전국시대 이후 각 지역의 다이묘들이 거주하던 성은 대부분 도시 중심에 자리한다. 중세 봉건시대 유럽의 성과 비슷한 방식이다. 현재 일본에는 1천 곳 정도의 성 혹은 성터가 남아 있다.
반면 한반도는 예로부터 산성의 땅이었다. 남한에만 1천500곳 이상의 성이 남아있고 북한과 만주지역을 더하면 2천 곳을 상회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산성은 삼국시대 이전에 축성되었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산성보다는 마을을 에워싸는 읍성(邑城)이 주류를 이룬다. 

백제 패망 직후 급거 축성
일본에 남아 있는 산성은 20곳 정도인데 대부분 고대에 축성된 것이고 한반도의 산성과 같은 방식이다. 때문에 일본 학자들도 이 시기 산성은 한반도에서 전래되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고대 역사서 <일본서기>에는 7곳의 산성 축성 기록이 전한다.
서기 663년 백제 부흥군과 왜 연합군이 백촌강(白村江, 금강 하구로 추정)에서 나당연합군을 상대로 최후의 결전을 벌였으나 패하면서 백제는 영영 멸망하고 수많은 신하들과 백성들은 왜국으로 넘어오게 된다. 백제 유민과 왜 조정은 나당연합군의 추격을 두려워해서 대마도~규슈~세토내해에 이르는 해로를 중심으로 산성을 쌓는데 이것이 <일본서기> 기록에 남은 산성들이다. 백제 장수들의 지휘로 백제유민들이 주축이 되어 쌓았으니 성은 당연히 백제식이다.
이보다 시기가 올라가는 산성은 규슈 지역에 모여 있는데, 이는 오사카와 나라 등 긴키(近畿) 지방에 왕조가 들어서기 전 규슈 지역에 왕조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반도에서 건너온 세력에 의해 규슈 정권이 먼저 성립되었고, 이후 이 세력이 세토내해를 따라 동진해서 긴키에 야마토(大和) 정권을 연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개국신화는 초대 천황이 되는 진무(神武)가 규슈에서 긴키지방으로 동진해 가서 나라를 연 것으로 되어 있다. 진무천황은 기원전 660년 즉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역사를 늘리기 위해 3~4세기경 오사카지역에서 정복왕조를 연 오진(應神) 천황이나 닌토쿠(仁德) 천황의 사례를 바탕으로 꾸민 가공의 인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세토내해를 접하고 있는 백제식 산성 중에 대표적인 곳이 바로 여기 오카야마의 키노죠(鬼ノ城)다. 이름도 ‘도깨비성’ 혹은 ‘귀신성’이라니 뭔가 특별한 사연과 전설이 있을 것 같다. 

오카야마 시내에서 도깨비성(키노죠) 방면으로 운행하는 철도 기비선(吉備線)은 모모타로선(桃太郞線)으로도 불린다. 전래동화 같은 모모타로의 전설을 모티브로 열차를 귀엽게 꾸몄지만 사실은 은인 같았던 백제왕자를 섬멸한 섬뜩한 역사가 배경이다. 일본 열차는 접이식 미니벨로도 가방에 넣어야 승차가 가능하다
;키노죠에서 가장 가까운 핫토리(服部) 역에는 백제 왕자 ‘우라’를 토벌한 이야기가 모모타로 전설의 무대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안내문 뒷부분에는 실제 백제 왕자 우라는 각종 도구와 철기를 전해준 고맙고 착한 존재였음을 적시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우리 땅에서 흔히 보는 삼국시대 석축 성벽 모습 그대로다. 석축 아래쪽은 급경사로 삭토해서 방어력을 높이고 있는데 삼국시대 산성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모모타로와 키노죠 
오카야마역에서 내려 모모타로선으로 갈아탄다. 오카야마는 모모타로(桃太郞) 전설로 유명한 고장이다. 그래서 열차 노선에도 모모타로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우리로 치면 흥부놀부, 햇님달님 같이 누구나 아는 전래동화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막연히 ‘옛날에 한 노부부가 살았는데…’로 시작된다. 노부부가 강물에 떠내려오는 큰 복숭아를 하나 주웠는데 여기서 아이가 태어나 모모타로(복숭아 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모모타로는 힘센 청년으로 성장해서 오니가시마에 사는 악한 도깨비를 물리치러 간다. 가는 길에 노부부가 만들어준 키비당고(수수경단)로 개와 원숭이, 꿩을 부하로 삼아 도깨비를 물리치고 많은 보물을 가지고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문득 모모타로 전설이 지금 가는 키노죠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모모타로선은 키노죠 근처를 지나가며 키노죠 역시 ‘도깨비성’ 아닌가. 전설에서 모모타로가 도깨비를 물리치러 가는 곳은 산성이 아니라 오니가시마(도깨비섬)다. 일설에는 이 오니가시마가 오카야마와 시코쿠 사이에 있는 메기지마(女木島)라고 한다. 이 섬 정상부에는 모모타로 전설의 그 도깨비굴이라고 알려진 오니가시마 대동굴도 있어서 더욱 그럴 듯하다. 하지만 나의 직감은 모모타로 전설과 키노죠는 반드시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오카야마의 에도시대 이름은 기비(吉備)였다. 4세기 이후 고대 일본의 중심지가 된 긴키지방(오사카, 나라, 교토)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데도 거대한 전방후원분이 여러 기 남아 있어서 일찍부터 상당한 정치세력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철기술을 가진 세력이 한반도에서 도래해 정착했다는 전설도 전한다. 7세기 전까지 고대의 일본 땅은 전국을 호령하는 집권체제가 갖춰지기 전의 사실상 무주공산이어서 대륙에서 건너온 집단이 곳곳에 자리 잡아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오카야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도깨비는 백제의 왕자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꽤 구체적인 전설과 역사 기록도 남아 있었다. 키노죠는 <일본서기>에도 있는 키비츠히코노미코토(吉備津彦命, 이하 키비츠)의 우라(溫羅) 퇴치 전설의 무대였고, 이 전설이 모모타로 이야기로 변형된 것이 분명하다.  
전설은 이렇다. 옛날에 우라(溫羅)라고 하는 도깨비가 키노죠에 살면서 사람들을 괴롭혀 조정에서는 이를 물리치려고 키비츠를 파견했다. 키비츠가 쏜 화살은 우라가 던진 돌에 부딪쳐서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때 신(神)이 나타나서 키비츠에게 한번에 화살을 두개씩 쏘라고 방책을 알려준다. 키비츠가 동시에 두개의 화살을 날리자, 하나는 우라가 던진 돌에 부딪쳐 떨어졌으나 다른 하나가 우라의 왼쪽 눈을 맞혔다. 이때 흘린 피는 치스이가와(血吸川)가 되었고 우라는 꿩으로 변해 달아났다. 키비츠가 매로 변신해서 쫓아가자 우라는 다시 잉어로 변해 도망갔다. 키비츠는 가마우지가 되어 마침내 우라를 잡아 목을 베었다는 내용이다.
서로 변신하면서 실력을 겨루는 이런 설화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김수로왕와 석탈해의 대결과 너무나 흡사하다. 키비츠는 기원전 3세기에 재위했다는 코레이(孝靈) 천황의 아들로 전한다. 전설 속의 도깨비 우라(溫羅)는 기원전 1세기에야 건국된 백제의 왕자라고 하니 시기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어차피 1~9대 천황은 가공의 인물로 보고 있는데다 일본 최초의 야마토왕조는 4~5세기에 성립되었다는 것이 정설이어서 이는 김수로왕 석탈해 전설에 가탁한 후대의 분식임이 분명하다. 김수로왕 석탈해 대결 역시 갈등과 경쟁 관계였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후대인들이 재미있는 스토리로 꾸며냈을 것이다.  
아무튼 미개했던 이 지역에 제철 기술을 알려준 고마운 존재였던 ‘우라’가 악한 도깨비로 그려진 것은 야마토 조정과의 세력 다툼에서 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내용은 키노죠에서 가장 가까운 핫토리(服部) 역에도 간단하게 안내문이 걸려 있다. 하지만 <일본서기>에는 스진(崇神) 천황 10년에도 키비츠히코(吉備津彦)를 서쪽에 파견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스진천황 10년이라면 기원전 87년이다. <일본서기>의 신뢰성은 이런 사례에서도 뒤죽박죽이다. 우라가 살았다는 키노죠는 백촌강 전투 이후 축성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660년대 후반경).

오카야마 들판에서 올려다 보이는 키노죠. 세토내해 방면으로 조망이 탁월하고, 만약의 경우 뒤쪽 산악지대로 도피하기에도 좋은 입지다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 패한 백제·왜 연합군은 나당연합군의 추격을 두려워해 예상 침입로인 세토내해 주변에 10여곳의 산성을 쌓아 대비했다. 키노죠도 그 중 하나다
위성사진(구글어스)으로 본 키노죠. 해발 397m의 키죠산 정상을 두르고 있는, 전형적인 백제의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약 2.8km
키노죠의 복원 조감도. 고위평탄면을 활용해 축성한 형태로 한반도에는 비슷한 형태의 산성이 수없이 남아 있다 (출처 : お城の見方·步き方, 2010, PHP)

 

3.1km의 오르막길     
오카야마역에서 모모타로선 열차로 갈아타고 비츄타카마쓰(備中高松) 역에 내렸다. 핫토리역이 더 가깝지만 이번 열차의 종점이 여기다. 모모타로선은 1시간에 한두 편뿐이다. 여기서부터는 자전거로 이동한다. 탁 트인 평야지대이고 북쪽으로 키노죠가 있는 키죠산(鬼城山, 397m)이 잘 보여서 길 찾기는 어렵지 않다. 산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키죠산 서쪽 골짜기로 나 있어서 그쪽을 목표로 하면 된다. 산 입구까지는 7km쯤 될 것이다.
북쪽에 인접한 아시모리(足守) 역 옆을 흐르는 개울이 백제왕자 우라의 눈에서 난 피가 흘렀다는 치스이가와다. 이 개울을 따라가면 키노죠 북쪽으로 갈 수 있지만 길이 멀고 험한데다 성의 중심지가 남쪽에 모여 있어서 철길을 따라가다 고속도로(오카야마 자동차도) 아래의 스나가와(砂川)를 끼고 상류로 향한다. 산 아래에는 개울을 따라 스나가와공원이 꽤 크게 조성되어 있다. 여기까지는 여유롭게 전원풍경을 즐겼다면, 이제는 고역의 시작이다. 산성까지 오르막만 3.1km나 된다. 해발 397m나 되는 산꼭대기까지 올라야 하니 예상한 일이지만 변속기가 3단뿐인 미니벨로로는 대책이 없다. 공원을 지나 몇 백미터나 갔을까, 본격적인 오르막이 나타나자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자전거를 두고 가도 되지만 나중에 내려올 때는 훨씬 편하고 빠르게 올 수 있어 끌고 가기로 했다.
헉헉대며 2km쯤 올랐을까. 해발 300m 지점인데 갑자기 길이 평탄해지면서 작은 고원지대가 펼쳐진다. 논밭도 있고 집도 몇 채 보인다. 이런 개간지는 산성 북쪽에도 조금 있는데 성 내에 평지가 없어 유사시 보급기지가 되었을 것이다.
길이 널찍하게 나 있어 자전거를 끌고 성까지 진입했다. 서문이 중세 일본식 건물로 복원되어 있어 오히려 본래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다. 역시 백제의 성이다. 산정을 중심으로 빙 둘러 성벽을 쌓았는데 둘레는 2.8km로 큰 편이다. 자연석을 가공해서 차곡차곡 쌓은 석축과 풍납토성에서 볼 수 있는 판축식 토성이 섞여 있다. 성벽 중간에 튀어나와 성벽에 다가선 적군을 공격할 수 있는 치성(雉城)의 흔적도 보인다. 성 안쪽에는 연못 터가 몇 군데 있다.
조망은 실로 탁월하다. 오카야마 평야지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저 멀리 세토내해도 조망된다. 바다까지는 25~30km로 가깝지 않지만 평야지대에서 거주하다 여차하면 산성으로 들어와 농성하기에는 최적의 위치다. 뒤편으로는 첩첩 산악지대여서 도주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백제 왕자 우라는 조국이 나당연합군에 멸망하자 이곳으로 건너와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대비했지만 신라와 당 사이에 전쟁이 발발해 일본 침공의 위협이 사라지자 오히려 불안을 느낀 야마토 왕조에 토벌당한 것으로 보인다. 본국은 망하고, 믿고 건너온 형제나라에서도 배신당하고 만 슬픈 운명이었다. 후세에는 모모타로가 물리친 도깨비로 미움 받고 있으니 더욱 처량한 신세다.
나이 지긋한 주민에게 도깨비가 된 백제 왕자에 대해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
“대륙에서 건너와 키도 크고 험상궂게 생겨서 사람들이 무서워서 도깨비라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제철 기술을 알려주고 주민들을 도왔으니 좋은 사람이었지요.”
백제 왕자뿐 아니라 고대의 한반도 전체가 일본에서는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이 아닐까. 문화를 전해주고 고대국가의 건설을 도와줬지만 결국에는 배척당하고 마는 그리고 고마웠던 일은 웬만해서는 내놓고 말하지 않는….  백제-신라의 원한관계가 한일 갈등의 근본 원인이라는 주장은 일리가 있어보인다. 

복원 전의 남문 주변 성벽 모습. 석축 안쪽은 판축공법으로 토축을 쌓았다. 진흙을 다져서 쌓는 판축공법은 삼국시대 토성의 전통적인 축성법이다
토축 아래 길게 도열한 석축을 코고이시(神籠石)라고 해서 일본 특유의 방식이라고 주장하지만 삼국시대 산성, 특히 고구려 산성에서 드물지 않게 발견된다
석축과 토축을 뒤섞어 조금은 어설프게 복원된 남문 주변의 성벽
정상 서쪽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남문 일원. 3단 변속기의 미니벨로여서 꼬박 정상까지 끌고 올라야 했다. 대신 돌아갈 때는 페달링 한번 없이 단숨에 들판으로 내려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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