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무 가득한 인천항, 대한의 자유를 지킨 관문

대중가요의 골목길 5 (인천)
해무 가득한 인천항, 대한의 자유를 지킨 관문

인천의 바다 또한 여느 항구처럼 이별과 눈물의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인천의 이별은 격이 다르다. 영원히 고국산천을 떠나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머나먼 여정, 그 출발이었다. 1902년 하와이로 떠나는 배 갤릭호에 목숨을 걸고 태평양을 건너 사탕수수밭 노동자가 된 조선의 무명저고리 바지가 우리의 할아버지들이자 최초의 해외 이민자였다. 
인천의 곳곳에 붙어 있는 ‘자유’라는 이름은 이 땅이 바람 앞의 등불이던 1950년 6·25의 비극 속에서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끝에 얻은 찬란한 보석이다. 오늘 우리는 그 ‘자유’를 다시 지켜 내야하기에 해무(海霧) 가득한 인천 앞바다에서 무적(霧笛)을 울리며 길을 찾는다

 

<이별의 인천항> 노래비 뒤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있어 월미도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이 되었다


내가 만난 첫 바다와 동인천역
남산 한 바퀴, 창신동의 유년시절, 그리고 삶을 마감한 미아리고개만으로 배호를 추억하는 것은 가객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우리 땅 곳곳을 밟아 돌아 보면 도 다른 노래로 배호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내 비를 쏟아낼 듯 잔뜩 웅크린 하늘은 휴일의 인천을 더욱 가라앉게 했다. 동인천역은 내겐 각별한 곳이다. 문경 산골소년이 서울 수학여행길에 끼워서 만나게 된 바다, 태어나 처음 보는 황해 바다로 가기 위해 내린 기차역이었다. 밤새 기관차를 타고 달려와 새카매진 콧구멍을 씻지도 못하고 잰 걸음으로 언덕길을 올라 만난 자유공원, 그 아침 화물선이 정박한 부두와 먼 바다는 오늘처럼 온통 잿빛이었다. 그저 바다를 보았다는 들뜬 마음에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눈에 들어올 리도 없었다. 

전쟁영웅 맥아더와 자유공원에서 만난 ‘자유’
이제 초로의 문턱에서 다시 만나는 맥아더장군의 동상은 숙연한 우상이다. 한반도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이던 6·25 전후시대를 아등바등 살아온 사람들에게 한 전쟁영웅의 결기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어린 학생들은 그냥 지나가지만 일부러 이 언덕을 올라온 일흔 살 문턱의 동창들은 감회어린 얼굴로 동상을 올려다본다. 정치 현실까지 옮아 붙는 그들의 분노를 지켜보고 있는 노장군의 무표정에 이 땅의 비극적 대치가 오버랩 된다.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에 들어가는 ‘인천상륙작전’은 다시 들여다보아도 참으로 대단한 작전이었다. 미 합참과 해군이 자연적 조건의 불리를 들어 반대했던 작전, 제2차 세계대전의 상륙작전 명장 맥아더는 조수간만의 차가 크다는 그 불리함을 역이용하여 1950년 9월 15일 새벽, 적의 허를 찔렀다. 2000명의 적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9·28 서울 수복의 교두보가 만들어졌다.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도 적의 뒤통수를 때린 이 상륙작전의 힘이었다. 칠곡 ‘다부동 전투’나 ‘안강전투’를 비롯해 한반도의 남쪽 전선은 온통 피비린내로 삶과 죽음이 뒤엉킨 상황이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사라져간 전우야 잘자라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달빛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담배 연기속에 사라진 전우야 
터지는 포탄을 무릅쓰고 앞으로 앞으로
한강수야 잘 있구나 우리는 돌아왔다
들국화도 송이송이 피어나 반기어 주는
노들강변 언덕 위에 잠들은 전우야
고지를 넘어서 물을 건너 앞으로 앞으로
우리들이 가는 곳엔 삼팔선 무너진다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 네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 
<전우야 잘 자라>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현 인 노래, 1950, 오케레코드

군가가 아니면서도 군가보다 더 널리, 지금까지 불리는 진중가요. <전우야 잘 자라>의 탄생은 1절을 박시춘이 작사하여 나머지를 극작가 유호에게 부탁하여 완성한다. 각 절마다에는 낙동강, 추풍령, 노들강변, 삼팔선이라는 북진의 이정표가 확실히 심어져 있다.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여‘라는 가사가 너무 자극적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골목에서 고무줄 놀이하는 아이들까지 부르는 공전의 히트를 한다.
  6·25 그 벼랑 끝에서 처절하게 지켜낸 생존과 자유는 하늘이 도와준 뜻이 아니라면 설명이 어렵다. 여전히 ‘맥아더장군의 동상을 부숴 없애버리겠다’고 날뛰는 우리 시대의 천둥벌거숭이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고마움을 모르는 후대의 이 염치없는 씨앗은 어디에서 배태된 것일까. 
 

동인천역 앞에서 눈에 들어오는 적벽돌 조적 창고, 오래된 인천의 속살을 삐죽이 보여준다(동인천동)
북성동 언덕의 차이나타운은 인천이 중국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케 한다(북성동)
리컴번트 자전거를 타고 차이나타운을 내려가는 자전거 마니아들(북성동)
자유공원 맥아더장군 동상 앞, 초로에 들어선 동창들이 멀리서 단체로 찾아와 참배하는 모습에 가슴이 뜨거워진다(송학동)
삼국지벽화거리에 선 공자 동상은 바다를 향해 있다. 서해 건너 고향을 바라보듯(선린동)
십상시(十常侍), 어디서 많이 듣던 단어 아닌가. 삼국지, 초한지 벽화거리는 차이나타운까지 이어진다(선린동)

 

짜장면의 원조 ‘공화춘’과 차이나타운의 부활
자유공원에서 차이나타운으로 내려오는 ‘인천화교중산학교’ 언덕길에는 삼국지의 장면 장면이 해설과 함께 벽화로 그려져 있다. 차이나타운의 역사는 쇠할 대로 쇠한 조선이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을 걸며 안간힘을 쓰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후베이와 산둥성 출신 화교들이 바다를 건너왔다.‘중국 사람은 칼 세 개면 먹고 산다’는 말이 바로 삼파도(三把刀)다. 식칼(菜刀)이 있으면 요리를 해서, 가위(剪刀)가 있으면 양복이나 봉제를 해서, 면도칼(剃刀)이 있으면 이발을 해서 먹고 산다는 뜻이다. 차이나타운에는 절강성 출신이 만든 인천원태양복점이 들어왔고, ‘대창반점’의 할아버지도 화교양복기술자였다.
이 땅에 살아온 역사가 100년이 넘었어도 화교의 정착에 우리는 인색했다. 땅을 사지 못하게 했고, 사는 집 외에 투자는 막았다. 차이나타운의 저물어가던 기운이 이제는 인천시의 적극적 지원 속에 인천의 명물로 다시 살아났다. 역시 먹는 게 남는 것일까. 춘장과 캬라멜을 적절히 배합해서 야채와 돼지고기로 볶아내는 한국 짜장면의 원조인 ‘공화춘’도 ‘성업중’이다. 드라마 ‘가화만사성’의 인기는 이제 차이나타운의 부활로 이어졌다. 주말에는 짜장면 한 그릇을 먹으려 해도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순번이 돌아온다. ‘자장면’과 ‘짜장면’을 모두 표준어로 인정하는데도 한 세기가 걸렸다. 누비솜바지를 입고 추위를 견딘 중국인의 인내가 인천 바다를 향한 북성동 언덕에 제대로 뿌리를 내려 빛을 보는 것이리라.
중국 장사꾼의 노래라면 당연히 <왕서방 연서>가 으뜸이다. 김정구 선생이 비장하게 부르는 <눈물 젖은 두만강>과는 딴판이다. 중국옷을 입고 우스꽝스런 말투로 부르는 만요풍의 노래는 가사를 곱씹어 볼수록 중국 상인 왕서방의 순정과 객기가 두루 묻어난다. 왕서방이 번 돈을 ‘몰빵’ 했는데도 야속한 기생 명월이는 다른 사내와 정분이 났는지 도통 코빼기를 볼 수가 없다. 아무래도 돈만 빨아먹고 먹튀한 게 틀림없다.

비단이 장사 왕서방 명월이 한테 반해서
비단이 팔아 모은 돈 퉁퉁 털어서 다 줬어
띵호와 띵호와 돈이가 어버서도 띵호와
명월이 하고 살아서 돈이가 무유데 띵호와
워디가 반해서
하하하 비단이 팔아서 띵호와
비단이 팔아도 명월이 잠이가 들어도 명월이
명월이 생각이 따다유 왕서방 병들어 누웠어
띵호와 띵호와 병들어 누워도 띵호와
명월이하고 살아서 왕서방 죽어도 괜찮아
워디가 반해서 하하하 비단이 팔아서 띵호와
명월이 얼굴이 띵호와 명월이 마음이 띵호와
<왕서방 연서>
김진문 작사, 박시춘 작곡, 김정구 노래. 1938, 오케레코드

광복 후에 김정구가 <왕서방 추억>, <넋두리 왕서방> 같은 연작 노래를 내놓은 것을 봐도 명월이를 향한 그 연모의 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2018년 진미령이 콧소리를 섞어 불러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트로트 곡 <왕서방>은 얄밉도록 경쾌하다. <왕서방 연가>에 대한 ‘염치없는 답가’라고 규정하는 것이 좋겠다.

왕서방 왕서방 비단은 많이 팔았수
사랑만 남겨놓고 사랑만 남겨놓고 어디 갔을까
왕서방 왕서방 비단은 많이 팔았수
가슴이 시리도록 가슴이 시리도록 생각이 난다
자꾸자꾸 계절이 가네 자꾸자꾸 세월이 가네
보고 싶은 님이여 사랑했던 님이여
운명같은 나의 님이여
흐예이예이예 흐예이예이예
흐예이예이예이예
흐예이예이예 흐예이예이예 
흐예이예이예이예
비단팔아 온다더니 아직까지 소식이 없네
왕서방 왕서방 비단은 많이 팔았수
빈 가슴 남겨놓고
빈 가슴 남겨놓고 어디 갔을까
왕서방 왕서방 비단은 많이 팔았수
앙가슴 시리도록 앙가슴 시리도록 생각이 난다
(후렴 동일) 왕서방
<왕서방>
김현진·진미령 작사, 송광호 작곡, 진미령 노래, 2018

우선 왕서방더러 “비단은 많이 팔았수, 돈은 많이 벌었수” 하고 놀리는 듯 말을 건다. 눈 맞아 살림을 차렸던 사내도 힘이 빠지고 돈떨어져 제 집으로 돌아가고, 명월이도 쭈글쭈글한 얼굴로 그래도 제 없이는 못살겠다던 왕서방이 어찌 사는지 궁금하기는 했던 모양이다. 지가 먼저 잠수 타 놓고도 ‘가슴시리도록 생각이 난다’는 둥 ‘운명 같은 나의 님’이라는 둥 너스레를 떤다. 비단 팔아 온다더니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고 완전히 덮어씌우는 내공까지 보인다.
<소녀와 가로등>을 부르던 청순한 이미지의 진미령은 간 곳이 없다. ‘으헤이 예이예 으헤이 예이예’ 같은 국적불명의 후렴구가 반복되는 것은 마지막 남은 멋쩍은 심사의 표출인가.
한성화교학교를 나온 진미령은 깜찍한 모습과 치파오의 살짝 터진 옆구리에 차이니스 칼라 깃 위로 목선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미인이어서 화교로 착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녀의 아버지 고 김동석 선생이 그립다. 1950년대에 HID 방첩대장으로 명성을 날렸고, 공무원으로 자리를 바꿔 경기도 기획관리실장으로 근무하던 1979년에는 내 결혼식의 주례를 서주기도 했던 후덕한 분이셨다.

 

역시 금강산도 식후경, 중국식 먹거리 앞에 모인 내방객(북성동)
페루 사람들이 전통복장을 하고 공연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북성동)
인천역은 경인선의 시발이자 종착역, 옛 하인천역이다(북성동)

 

육지로 이어진 월미도, 청춘과 위락의 공간
월미도로 들어서는 초입에는 인천상륙작전 당시 최초로 상륙한 지점을 나타내는 표지석이 맞아준다. 말썽 많았던 월미도 모노레일이 8월 개통을 앞두고 월미공원역을 지나가며 공중에서 내려다본다. 그래도 주말을 맞은 사람들은 월미도의 바다로 나온다. 푸른 기운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바다지만 갈매기가 새우깡을 받아먹으러 소리소리 지르며 선회하기에 심심할 틈이 없다.
‘월미문화거리’가 바깥바다 쪽으로 거의 끝나갈 즈음, 1999년에 만든 <이별의 인천항> 노래비가 서있다. 목포 사람 이난영이 <목포의 눈물>을 불렀다면, 인천 사람 박경원이 <이별의 인천항>을 불렀다. 인천의 대표곡 반열에 든다. 항구마다 맺고, 두고 떠나는 이별의 풍경이어서 <목포의 눈물>이나 <돌아와요 부산항에> 같은 비장미를 느낄 수 없는 평범한 노랫말이다.
  세월호의 할아버지쯤 되는 203톤급 은하호는 한 달에 4번 제주를 왕복했었다. 여름이면 만리포를 경유하기도 해서 박경원은 <만리포 사랑>이라는 청춘 송가도 불렀다. 

쌍고동이 울어대는 이별의 인천항구
갈매기도 슬피 우는 이별의 인천항구
항구마다 울고 가는 마도로스 사랑인가
정들자 이별의 고동소리 목메어 운다
등대마다 님을 두고 내일은 어느 항구
쓴웃음 친 남아에도 순정은 있다
항구마다 웃고 가는 마도로스 사랑인가
작약도에 등대불만 가물거린다
마도로스 수첩에는 이별도 많은데
오늘 밤도 그라스에 맺은 인연을
항구마다 끊고 가는 마로도스 사랑인가
물새들도 눈물짓는 이별의 인천항구
<이별의 인천항>  
세고석 작사, 전오승 작곡, 박경원 노래, 1954, 오아시스

월미도라는 지명을 제목에 등장시키고 작약도, 영종도 같은 인천 앞바다의 섬을 노래하는 주현미의 <월미도를 아시나요>도 널리 알려진 곡은 아니나 인천사람에겐 자랑이다.

부딪치는 파도소리 멀리 퍼지고
사랑노래 불러주는 물새들이 정다워라
뱃고동 울리면서 정든 님이 오시는 길에
등대도 손짓하며 님을 반기는
월미도를 아시나요 인천의 월미도를
작약도 영종도를 오가는 뱃길 위엔
물새들이 노래하고 파도도 춤을 추네
산과 바다 조화 이뤄 한 폭의 그림일세
월미도를 아시나요 인천의 월미도를
<월미도를 아시나요>
 반야월 작사, 김점도 작곡, 주현미 노래, 1985, 오아시스

인천그린실버악단 대표이자 KBS ‘가요무대’ 자문위원이기도 한 김점도 작곡이다. 그의 인천사랑은 향토가요작가 대상 수상과 <인천찬가>, <내 고향 인천>, <내 사랑 인천항구>, <인천항> <인천 아이들>, <달리는 인천>, <이별의 인천공항>처럼 인천을 내세운 노래에서도 나타난다.
 

월미등대. 갑문 건너는 옛 소월미도 등대를 일제가 폭파한 자리에 해상교통관제센터가 들어서 있다(북성동)

 

한 자리에 모인 코리안 디아스포라, 한국이민사 박물관 
월미도등대까지 걷고 돌아가다 만나는 ‘한국이민사 박물관’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이 땅을 떠난 700만 해외교민들의 발자취와 기록을 보여준다. 1902년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로 떠난 이민자들의 험난한 여정을 비롯해 일본·중국은 물론 멕시코·쿠바·러시아·독일·중남미까지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이국땅의 자랑스러운 코리언의 기록관이다. 천천히 둘러보면 근대 한국사의 고단했던 경로가 고스란히 내 안으로 들어온다.
일제가 폭파한 소월미도 등대 터(해상교통관제센터 위치)를 먼발치서 보고 월미도를 한 바퀴 돌아 제6, 7부두 쪽으로 나오면 두 가지의 풍경을 만난다. 내항에 붙어 있는 16개의 대형 곡물 사일로에 그려진 벽화가 장관이다. 100일간 22명이 달라붙어 그리는데 86만5400ℓ의 페인트가 들어갔다. 일부러 이 그림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생겨날 정도다. 또 하나, 부두에는 중동이나 남미 등지로 팔려 선적대기 중인 중고차의 도열이 엄정하다. 유리창에는 ‘예멘’, ‘Sold Out’ 같은 영문이 적혀 있어 그들의 행선지와 운명을 말해 준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폐차 수명에 가까운 차량들이지만 ‘MADE IN KOREA’의 견고함을 증명해 주고 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연안부두 떠나는 배야
연안부두로 가는 길은 인천항의 명물인 갑만식 도크가 만들어낸 여러 개의 부두를 한 바퀴 돌아가는 코스다. 신포역, 제2국제여객터미널, 인천출입국관리사무소, 인천지방해양항만청, 인천본부세관 등 모두 바다와 관련된 기관들이 줄지어 자리 잡고 있다.
연안여객터미널과 제1국제여객터미널이 연안부두의 주인격이지만 팔미도로 떠나는 유람선 선착장 입구에 인천을 대표하는 노래비가 서 있다. 김트리오의 <연안부두>다.

어쩌다 한 번 오는 저 배는 무슨 사연 싣고 오길래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마음마다 설레게 하나
부두의 꿈을 두고 떠나는 배야
갈매기 우는 마음 너는 알겠지
말해다오 말해다오 연안부두 떠나는 배야 
바람이 불면 파도가 울고 배 떠나면 나도 운단다 
안개 속에 가물가물 정든 사람 손을 흔드네
저무는 연안부두 외로운 불빛 
홀로 선 이 마음을 달래주는데
말해다오 말해다오 연안부두 떠나는 배야 
<연안부두> 
조운파 작사, 안치행 작곡, 김트리오 노래, 1979. 현대음반

김트리오는 드럼의 김파, 기타의 김단, 건반의 김선 3남매 가족밴드다. 미국에서 각자 기악을 전공하던 이들이 1979년 3월 귀국해서 부친 베니김(김영순)과 인연이 있던 안타기획(대표 안치행)과 손잡고 만든 노래다. 미8군쑈단 트럼펫 연주자였던 아버지 베니김과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부른 이해연이 어머니이니 이들의 음악성은 이미 타고난 것이다. 발매 3개월 만에 5만장의 빅히트를 기록하고 1980년 TBC 방송가요대상(중창부문)을 수상한다. 쓸쓸한 노래지만 프로야구 SK와이번스의 응원가로, 2014년에는 인천아시안게임 성공을 기원하며 조관우가 댄스곡으로 편곡하여 부르기도 했다. 인천을 대표하는 노래로 자리 잡고 있다.
또 한곡의 노래는 남진의 출세곡 <가슴 아프게>다. 흔히 이 노래가 바다를 공간의 중심에 놓고 있어 사람들이 남진의 고향인 목포의 바다가 탄생지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작사가 정두수는 1966년 어느 봄비 내리는 날, 대낮부터 들른 선술집에서 손님도 없는데 여주인이 틀어 놓은 라디오 연속극에서 울려 나오는 뱃고동 소리를 듣고 바로 연안부두로 달려왔다. 시인다운 감성이다. 비 오는 날의 바다는 정취야 있지만 정작 보이는 것은 없다.    연안부두에서 그는 소년시절을 보낸 부산 광안리 바다를 생각했다. 손에 잡힐 듯하며 그를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사랑과 이별의 가운데 들어서 있는 ‘저 바다’라는 생각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단숨에 써내려간 가사다. 2절의 마지막 행은 원래 ‘그리움만 남겨두고 가버린 사람’이었지만 1절의 반복 후렴으로 단순화 시켰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해 저문 부두에서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 마음 같이 목메어 운다
당신과 나 사이에 연락선이 없었다면
날 두고 떠나지는 않았을 것을 
아득히 바다 멀리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 마음 같이 목메어 운다
<가슴 아프게>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 남 진 노래. 1967, 지구레코드

 

월미도 초입에는 인천상륙작전 시, 최초 상륙지를 보여주는 비석이 서 있다(북성동)
월미문화의 거리는 다양한 조형물이 해변의 낭만을 더욱 고조시켜 준다(북성동)
월미등대 입구의 이동식 노래방. 손님은 없고 무명가수라는 주인이 <귀거래사>를 연달아 부르고 있다(북성동)

 

연안부두는 역사의 흔적도 여기 저기 보인다. 1904년 2월 9일 여순항과 제물포항에서 동시에 발발한 ‘러일전쟁’의 첫 격돌지가 연안부두다. 2004년 푸틴 정부가 ‘러일전쟁 100주년 추모비’를 설치하고, 인천시는 인천연안부두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이라 이름 붙였다.
연안부두 녹지대 한쪽에 2011년 세운 배호의 노래비가 서 있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노래 <비 내리는 인천항 부두>다. 역시 그의 노래는 비에 젖어야 제 맛이 난다. 말 못할 사연, 기구한 운명 앞에 속수무책인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눈물 흘리는 일 뿐, 그 눈물이 비로 치환되어 흘러내리는 것이다. 배호의 원곡은 듣기가 쉽지 않고, 그를 사랑하는 팬들이 모창으로 부른 노래들이 유튜브를 차지하고 있다.

보슬비 내리는 인천항 부두
오고가는 연락선에 사랑도 운다
기맥힌 사연만 남은 항구야
조수처럼 왔다가 가는 사람아
아~아~아 인천항 부두에 비만 나린다
이별도 서러운 인천항 부두
떠나가는 뱃머리에 사랑도 운다
갈매기 짝 잃은 인천항구야
고동처럼 울다가는 사람아
아~아~아 인천항 부두에 비만 나린다
<비 내리는 인천항 부두>  
이인선 작사, 라음파 작곡, 배호 노래

세월호의 직격탄은 해운여객업에도 떨어졌다. 없어진 인천-제주 노선은 우리나라 연안여객선의 가장 긴 항로다. 내인가가 나 있어 꿈틀거리기는 하지만 강화된 규제와 만만찮은 보험료로 선박구매조차 쉽지 않아 언제 재개할지 여전히 미지수다. 중국을 드나드는 국제항로를 통한 보따리 장사꾼들의 행렬도 예전만큼 성업은 아닌 듯하다.
그래도 부두의 이별은 ‘언젠가는’ 이란 막연한 상봉의 기약이라도 하련만 이제 연안부두에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별의 의식이 치러지고 있다. 검은 상복을 입은 상주들이 낚싯배를 빌려 바다로 나가 화장한 유골을 뿌리고 돌아오는 ‘바다장례’의 행렬이 무시로 이어진다. 그야말로 기억만 남겨 놓고 떠나는 가없는 수평선의 이별에 부치는 뱃고동은 아득한 진혼곡이다. 
 

코리언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한 자리에 모여 있는 ‘한국이민사박물관’(북성동)
곡물사일로에 그려진 초대형 벽화와 중동으로 가기 위해 선적을 기다리고 있는 중고 자동차들. 그만큼 우리가 잘 살게 된 증거다(북성동)
연안부두에는 배호의 <비 내리는 인천항부두> 노래비가 있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노래다(연안동)
‘이경종 인천 학생·스승 6·25참전 역사기록관’. 잊혀져 가는 호국의 희생을 후세에 전하려는 개인의 노력이 눈물겹도록 고맙다(신포동)
연안부두는 대형여객선에서 소형 선박까지 다양하게 드나든다. 검정옷을 입은 사람들이 ‘바다장례’를 위해 낚싯배를 타러 가고 있다(연안동)


참고자료
1. ‘노래따라 삼천리’, 정두수, 미래를 소유한 사람들, 2013 2. ‘한국가요사2’, 박찬호, 이준희, 미지북스, 2011
3. ‘가요앨범 <김트리오>’, 송명하, 대중가요연구소 
4.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인천상륙작전
5. <화양연가를 노래했던 화선장>,  유동현, 인천이야기 발전소
6. ‘한국가요편람(신민요부터 1990년말까지)’,  문화방송 · 한국음악저작권협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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