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마음의 고향 이세신궁

지피지기 일본행⑤ 
미에 (三重 )
일본인 마음의 고향 이세신궁

8만 신사, 800만 신들의 고향, 이세신궁은 평일에도 참배객들로 넘쳐났다. 연간 1천만명이 찾고 일본인이라면 평생 꼭 한번은 방문하고 싶어 한다는 ‘마음의 고향’이 이세신궁이다. 천황가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모신 신궁은 20년마다 건물을 헐고 새로 지어 고졸미는 없지만 정말 신이 살 것 같은 신비감과 엄숙미가 서려 있다. 도대체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단 말인가

일본 신도(神道) 신앙의 총본산이자 고대사의 미스터리를 품고 있는 이세신궁 내궁의 정전. 신화속 일본 천황가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모시고 있고 고목에 에워싸여 신비로운 느낌을 더해준다. 정궁인 내궁(內宮)과 외궁(外宮)으로 구분되며, 이밖에도 별궁 14개소, 말사(末社) 24개소, 섭사(攝社) 43개소, 소관사(所管社) 42개소 등 총 125사(社)로 이루어진 거대한 신사 집단이다. 총면적은 이세시 전체의 1/3에 달하는 5500ha(약 1650만평)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다

 

나고야역을 출발한 특급열차는 서쪽으로 시내를 벗어나 쾌속으로 질주했다. 티 없이 맑은 가을 날씨. 아득히 북쪽으로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배경이 된 이부키산(1377m)이 50km 거리를 두고도 선명하다. 조금 높은 지대에 오르면 산정에 눈을 이고 있는 일본 알프스의 3000m급 고봉들도 보일 것이다.
나고야 일원의 평야는 도쿄가 자리한 칸토평야 다음으로 넓다. 노오비(濃尾) 평야라고 하며 평야 대부분이 시가지로 뒤덮여가고 있다. 간사이 본선을 따라가다 욧카이치(四日市) 시 즈음에서 사철(私鐵)인 이세철도로 들어서면 본격적인 이세가도(伊勢街道)와 동반한다.
이세가도…. 일본 역사나 문화 속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이 길의 정체는 도대체 뭔가. 가도의 목적지는 이세신궁이다. 일본인들이 흔히 ‘마음의 고향’이라고 부르는 신사로 전국 8만 개에 이르는 신사 중에 최고권위의 총본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인 마음의 고향’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고 왜 그럴까. 그 호기심을 풀기 위해 나도 이세가도를 달린다. 연간 1천만명이 간다는 이 길을.

신화와 귀신의 나라
세계 최첨단의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로 세계 3위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일본이지만 사유체계나 정서를 보면 원시 고대국가와 큰 차이가 없는 모습을 보게 된다. 8만개의 신사는 온갖 신과 귀신을 모시고 있고 사람들은 신비한 효험을 믿으면서 신사를 참배한다. 흔히 일본에는 800만의 신이 있다고 하며, 나라 자체도 신이 세웠고 천황가는 신들의 직계 자손이라고 믿는다.
13세기, 여몽연합군의 2번에 걸친 침입이 때마침 불어온 태풍으로 실패하자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신의 나라(神國)라는 의식이 더욱 공고해졌다. 8세기 초에 쓰여진 <일본서기>와 <고서기> 같은 고대 역사서도 신화적인 내용을 역사적인 사실처럼 기록하고 있어 이런 관념의 이론적 바탕이 되어준다.
이세신궁이 일본 전국 신사의 총본산이 된 것은 황실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후손인 진무(神武) 천황이 기원전 660년 제1대 천황으로 즉위한 이후 현재의 제126대 나루히토(德仁) 천황까지 하나의 혈통으로 줄곧 이어져왔다는 ‘만세일계’ 천황가는 아직도 신봉된다. 하지만 천황가의 혈통이 바뀐 경우가 여러번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부족국가도 이루지 못한 원시 조몬시대인 기원전 660년에 진무천황이 즉위하고 중앙집권제 국가가 성립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4세기경 중앙집권적 고대국가가 처음 성립했고 7세기 중엽 다이카개신(大化改新)으로 천황제가 확립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천황이라는 용어가 가장 먼저 등장한 것도 7세기 초 섭정 중이던 쇼토쿠(聖德) 태자가 중국 수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해가 뜨는 동쪽 나라의 천황(天皇)이 해가 지는 서쪽 나라의 천제(天帝)에게 인사드린다”라는 대목이 처음이다. 어쨌든 중국의 천자와 맞먹는 격식을 내세운 자부심과 배포는 엿볼 수 있는데, 바다 건너 멀리 있어 중국의 침략을 받을 리 없다는 자만심도 느껴진다.         
하늘에서 내려온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후손이니 천황은 곧 ‘사람으로 나타난 신’이라는 현인신(現人神)으로 인정받아 침범할 수 없는 절대권위를 갖게 되었다. 무사가 집권한 700년 간의 막부정권 시절에도 실권은 없었지만 천황은 막부 위에 군림했고, 형식적으로는 막부의 집권자인 쇼군도 천황에게 임명을 받아야 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는 강성해진 제후가 천자가 되는 역성혁명이 수없이 일어났지만 일본에서는 단 한번도 그런 일이 없었다. 그것은 천황이 인간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후손으로 인간은 절대 범접할 수 없다는 믿음이 일본인 모두에게 유전자처럼 각인된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이 같은 ‘천황 신앙’은 근세 이후 일본 정신을 내세우고 절대화하는 국학(國學) 바람이 인 이후 더 강화되었다. 20세기 들어서도 군국주의는 전쟁과 팽창의 명분을 찾기 위해 천황의 신격화를 주도하기도 했다. 국민들은 신이 다스리는 일본이 전쟁에서 질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다 2차 대전 패전 이후 천황은 스스로 신성을 부정하고 ‘인간선언(人間宣言)’을 하게 된다. 20세기 중반에 그것도 열강의 하나라는 일본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미신과 우상화 작업에 세계는 경악했다.
하기야 수많은 천재를 배출하고 문화 예술의 선진국을 구가해온 독일인이 아우슈비츠를 만든 히틀러를 숭배한 것이나, 21세기 중후반의 김일성 신격화 작업을 보면 현대인이라고 미신과 우상화의 세뇌에 특별한 면역력이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외궁 정전 입구에 있는 미츠이시(三つ石). 20년마다 기존 정전 건물을 허물고 바로 옆에 새로 지어 옮기는 시키넨센구(式年遷宮) 때 액막이 제례를 하는 곳이다. 손을 올리면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신비의 장소로 유명하다
외궁의 정전. 내궁 정전과 마찬가지로 무채색의 소박한 건물로 안쪽에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식사를 담당하는 도요우케노오미카미 신주를 모시고 있다. 특별할 것도 없는데 내부 촬영이 금지되어 있고 철저히 감시해서 비현실적인 괴리감과 엄숙함을 조장한다
내궁으로 진입하려면 속계와 성계(聖界)를 가른다는 우지바시(宇治橋)를 건너야 한다. 다리 위에서 상류 방면으로 본 이스즈가와(五十鈴川). 산은 일본 산답지 않게 낮고 둔중하며 물은 한없이 맑다
이스즈가와 저편으로 가을 빛을 살짝 묻힌 녹음이 대단히 울창하다

 

이세시의 1/3을 차지하는 125개 신사 집단 
열차는 시속 100km를 넘나들며 나고야까지 깊이 들어온 이세만을 따라 남하한다. 도중에 스즈카(鈴鹿)를 지난다. 세계최고의 자동차 경주인 F1이 열리는 스즈카 서키트가 있는 곳이다. 서키트 옆에 선 대형 관람차가 저쪽으로 보인다. F1이 열린다는 것은 서구 입장에서 경제, 문화적으로 선진문명임을 자랑할 수 있는 하나의 증표다. 우리나라도 영암에서 2010년부터 4년간 열렸다가 관심 부족으로 적자가 누적되어 중도하차하고 말았다.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스포츠이기도 하지만 국격을 위해서도 대단히 아쉬운 일이다.
스즈카에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있었던 후와관(不破關), 후지산 옆의 하코네관(箱根関)과 함께 일본 3대 관문인 스즈카관이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 조령처럼 스즈카고개(350m) 초입에 관문을 두었는데 고개를 넘으면 비와호 남단을 거쳐 교토로 이어지는 주요 길목이다. 이런 관문은 지역을 나누는 분기점이 되어서 오사카를 비롯한 간사이(關西) 지방은 후와관 서쪽을 말하며, 도쿄 등 칸토(關東) 지방은 하코네관 동쪽을 뜻한다. 우리도 대관령을 중심으로 관서와 관동지방이, 철령을 기점으로 관북지방이 구분된다. 
나고야역에서 1시간30분여, 마침내 이세시(伊勢市) 역에 도착했다. 역전으로 나서니 예상하긴 했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은 신궁 참배객뿐이라는 듯 안내문과 관광지도, 버스와 택시 모두가 이세신궁 일색이다.
이세신궁은 일단 규모부터 간단하지 않다. 크게 정궁인 내궁(內宮)과 외궁(外宮)으로 구분되며 외궁은 역전에서 400m만 곧장 가면 된다. 내궁은 외궁에서 5km 정도 떨어져 있어 자동차를 이용해야 한다. 이 외에 별궁 14개소, 말사(末社) 24개소, 섭사(攝社) 43개소, 소관사(所管社) 42개소 등 총 125사(社)로 이루어진 거대한 신사 집단이다. 총면적은 이세시 전체의 1/3에 달하는 5500ha(약 1650만평)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다.  

어마어마한 참배 인파  
열차에는 승객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내궁 앞에 도착하니 오전 시간인데도 인산인해다. 평일 낮 시간이면 마을이나 골목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여기 다 모여 있구나 싶은 생각에 잠시 섬뜩해졌다. 이 사람들은 아직도 신화의 세계를 철저히 믿는구나 싶기도 해서 사람들의 행렬 속에서도 소외감이 든다. 무신론자 외국인의 눈으로 볼 때 조금 과장하자면, 샤머니즘에서 벗어나지 못한 원시 정신세계와 최첨단 현대문명의 양극단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모습은 정말 당혹스럽다. 일본에 아무리 오래 살아도 외국인은 절대 이해하거나 녹아들지 못할 것 같다.
외궁의 정식 명칭은 도요우케다이진구(豊受大神宮)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받드는 농경신 도요우케노오미카미를 기린다. 자전거는 입구의 거치대에 묶어두었다. 거치대에는 직원용으로 보이는 자전거만 몇 대 있을 뿐 자전거로 신궁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경내는 매우 넓고 평탄하며 숲이 울창하다. 숲 곳곳에 전각이 들어서 있으며 사람들은 누가 지시하지 않았는데도 얌전하게 줄을 서서 다닌다.
일본의 건국신화는 우리의 단군신화나 가야 건국신화와 매우 비슷하다. 태양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는 손자인 니니기노미코토(邇邇杵尊)를 지상으로 내려보내 다스리게 하는데, 이 니니기노미코토가 내려온 ‘천손강림(天孫降臨)’ 신화의 무대가 규슈 남단의 가고시마현 기리시마(霧島) 연봉 일원으로 비정된다(본지 2019년 5월호 참조). 그런데 니니기노미코토가 내려온 곳이 구지후루다케(久志布多氣)이고, 그를 맞이한 신관이 9명이며, 이들은 신이 내려와서 북을 치며 기뻐했다고 한다. 이는 구지봉에 내려온 김수로왕의 건국신화와 일치한다. 여기 기리시마 연봉에서 가장 높은 주봉은 ‘가라구니다케’로 읽는 한국악(韓國岳, 1700m)이다. 이를 보면 일본의 건국신화는 단군신화와 가야 건국신화를 차용했거나 도래인 정복자를 신화적으로 그렸다고 보는 해석이 가능하다. 한반도에서 가까운 규슈이니 더욱 그런 가능성이 높고, 보다 본질적으로는 섬나라인 일본은 어차피 대륙에서 사람이 건너올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세신궁에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모습을 비추었던 신성한 거울을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 황실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삼종의 신기(神器)가 있는데 쿠사나기의 검(草薙劍), 야타의 거울(八咫鏡), 야사카니의 곡옥(八尺瓊曲玉)이다. 이세신궁에는 이 중 야타의 거울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본 사람은 없다고 한다.  

내궁 맞은편에는 700m에 달하는 상가거리가 형성되어 있다. 전통적인 인력거는 일본 관광지 곳곳에서 아직도 성업중이고 꾼들의 자부심과 책임감도 대단하다
수목원 같은 울창한 난대림 숲이 신이 깃들인 듯한 엄숙미를 더해준다. 한 그루의 고목도 때로 귀기(鬼氣)나 신기(神氣)를 발하는데 거대 고목의 밀림은 괜히 주눅들게 한다. 무리가 아니라 혼자 걸으면 압도되는 느낌이 들 것이다
정궁 근처의 거목에는 깃든 전설도 많아서 참배객들은 일일이 살펴보고 지난다
정궁 가는 길. 넓은 숲속에 건물이 산재해서 방향을 가늠하기 어렵다. 그런데 신은 왜 이곳을 점지했을까

 

금기 또 금기
신궁의 중심 건물인 정궁(正宮)은 가장 안쪽에 있다. 금기와 비밀을 통해 신비감과 권위를 높이는, 약간은 전근대적이고 어쩌면 비현실적인 방법은 일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이세신궁의 정궁은 촬영이 금지돼 있다. 일반 신사와는 달리 입장도 안 되고 도리이(鳥居)만 넘어가서 멀찍이 볼 수 있을 뿐이다. 혹시 사진을 찍지 않는지, 안쪽으로 넘어가지 않는지 경비원이 지키고 있고 감시 카메라도 주시한다. 이런 엄격한 금기는 신비성과 절대성을 고무시키는 장치가 된다.
정궁 건물은 인공적 색감이라고는 없는 무채색에 매우 단순하고 원시적인 구조다. 나라(奈良)에 있는 고대 황실의 창고인 쇼소인(正倉院)과 비슷하게 바닥이 허공에 뜬 고대의 창고 비슷한 형태이며 모두가 목재다. 이런 고상(高床)의 다락식 창고 건물은 고구려의 부경(桴京)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붕의 마감 부분의 목재를 X자 모양으로 돌출되게 만든 장식은 치기(千木)라고 하며 신사 건축의 상징처럼 사용되어 일본 건축의 장식적 미의식이라고 평가되지만 이는 고대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다. 용마루와 처마선까지 수많은 직선들의 연결은 강직한 결기를 느끼게 한다.
이 단순하고 고대풍 물씬한 건축미는 690년 처음 건축된 것과 똑 같다고 한다. 갓 지은 듯 새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실제로도 몇 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궁 건물이 고대 형식이라 건물 수명이 짧아 20년마다 기존 건물을 허물고 바로 옆에 새로 지어 옮기는 시키넨센구(式年遷宮)를 지금도 지키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2013년 제62차 때 지은 것이다. 바로 오른쪽의 공터는 2013년 이전에 정궁이 있던 곳으로, 2033년에는 다시 이곳으로 정궁을 옮겨 짓게 된다. 이런 번거롭고 독특한 작업을 1200년 이상이나 끊이지 않고 지켜오다니 정말 대단하다는 감탄사와 함께, 신화와 미신을 철저히 신봉한 결과 정열과 에너지를 터무니없는데 소모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일본 국민을 정서적 동일체로 이끄는 상징의 힘은 부럽기도 하다.

넉넉하고 푸근한 산세에 안긴 내궁   
외궁을 나와 내궁으로 향한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모신 정궁이니 이세신궁의 진면목은 내궁에 있을 것이다. 정식명칭은 코오타이진구(皇大神宮)이다.
길은 간단하다. 외궁 앞쪽을 지나는 32번 현도를 따라 5km 정도 남쪽으로 계속 가면 오른쪽으로 입구가 나온다. 외궁 입구까지 500m나 남았는데 주차를 기다리는 차량들로 정체가 빚어지고 있다. 연간 천만명이 찾는다는 게 과장이 아니다. 그렇다면 매일 2~3만명이 방문한다는 뜻인데 전국민이 꼭 한번은 이세신궁을 찾는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다. 
우리에게도 이런 곳이 있을까. 전국민이 같은 마음으로 동경하는 전통의 장소가 있을까. 자연물인 백두산 정도일까. 우리에게 역사, 문화적으로 전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대상이 없다는 것을 이세신궁에 흘러넘치는 행렬 속에서 절감한다. 서로가 처절하게 싸운 전국시대를 근세에 겪었고 불과 100여년 전만 해도 200여개의 번(藩)으로 나뉘어 별개의 나라처럼 살던 사람들이 신화든 미신이든 이렇게 공통의 정신이자 정서로 교감하고 있는데, 단일민족의 중앙집권제로 2천년 이상 살아온 우리는 오히려 더 흩어지고 있으니….
역시 내궁은 외궁보다 인파가 더 하다. 이륜차 주차장에 자전거를 묶어 두고 속계와 성계(聖界)를 가른다는 이스즈가와(五十鈴川)에 걸린 우지바시(宇治橋)를 건넌다. 길이 100m, 폭 10m 정도의 다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서 그냥 인파에 떠밀려 지나야 한다. 이런 인파 속에서도 개울물은 투명할 정도로 맑다. 도대체 이렇게 맑은 물이 흐르는 산은 얼마나 깊을까 싶어 상류 방면으로 시선이 간다. 육산(肉山)이지만 전형적인 청년기 지형으로 강파르고 날카로운 일본 특유의 산세가 아니라 푸근하고 무던한 산줄기가 유연한 곡선으로 겹친다. 높이도 해발 400~500m 정도. 한반도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산세다. 문득 이런 산세에 안긴 신궁에 묘한 친근감이 든다. 신궁 뒤편의 산은 대부분 신궁의 영역에 속한다.
내궁의 백미는 경내 전체를 가득 채운 엄청난 삼나무 고목이다. 키가 30m를 훌쩍 넘는 고목들이 곧게 뻗어 하늘을 가리면서 저절로 엄숙하고 진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신궁 건물의 직선은 삼나무의 직선과도 겹친다. 우리 한옥의 곡선 처마가 소나무의 곡선미와 오버랩되듯이.
가장 안쪽에 자리한 정궁은 외궁과 마찬가지로 촬영금지에 입구에서만 겨우 볼 수 있을 뿐이다. 20년마다 옮겨 짓는 것도 같아서 옆에는 똑 같은 규모의 공터가 있다.
참배객들은 진심으로 조심조심 걸으며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안내자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며 나무 한그루, 전각 하나하나를 차례로 돌아본다. 그 모두에 온갖 사연과 전설이 깃들어 있는데 이미 신의 세계에 들어섰으니 사실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수천년을 전해왔고 또 지금도 신봉되고 있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우지바시를 다시 건너나오니 오른쪽으로 700m에 달하는 상가거리가 나온다. 기념품이나 특산품을 파는 가게와 식당들이 즐비하고 사람들은 그보다 더 많다.  
이스즈가와를 따라 하류로 내려가면서 나는 때때로 멈춰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국내에서 수없이 보았을 것 같은 평범한 산야. 이렇게 평이한 곳에 일본 신사의 총본산이 자리한 이유는 과연 뭘까. 역시 유래는 외부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바닷가이고 서쪽으로 고개 하나만 넘으면 일본의 고대국가가 탄생한 아스카(飛鳥)와 나라(奈良)인 입지는 어떤 연결고리를 말해주는 것만 같다. 

하늘에서 본 내궁 정전. 위쪽의 공터가 20년마다 기존 건물을 허물고 바로 옆에 새로 지어 옮기는 시키넨센구(式年遷宮)의 공간이다. 690년 창건 이후 이를 지키고 있다는데, 현재의 정전은 2013년 제62차로 지은 것이다
일본 목조건물의 가구와 격식의 절정을 보여주는 내궁의 이케전(御饌展). 일종의 참배소로 하루 두차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식사를 올리는 제례가 진행된다
내궁을 돌아보고 이세를 떠나는 길. 역무원도 없는 이스즈가오카(五十鈴丘) 역에서 간식을 들며 열차를 기다린다. 다음 여정은 남쪽의 토바(鳥羽) 시로 내려가 페리를 타고 이세만을 건너 아이치(愛知) 현으로 간다. 산악열차를 타고 일본 알프스 깊숙이 들어갈 것이다
이세만을 횡단하는 페리. 일본은 섬도 많지만 리아스식 해안으로 반도와 만(灣)도 많아서 페리 교통이 잘 발달해 있다. 겨우 1시간 거리지만 배여행은 여수(旅愁)의 폭과 깊이를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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