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 기요마사 그리고 미야모토 무사시

지피지기 일본행 ① 구마모토(熊本) 
임진왜란 ‘원흉’의 두 얼굴, 성자가 된 검객 이야기
가토 기요마사 그리고 미야모토 무사시

구마모토(熊本)는 조선 입장에서는 잔혹했고 왜군 입장에서는 용맹했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가 초대 영주로 있던 곳이다. 구마토성은 ‘축성의 귀재’라는 기요마사의 별칭답게 규모와 구성이 엄청나서 일본 3대 명성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기요마사는 임진왜란의 업보인지 2대만에 영지를 몰수당하고 만다. 구마모토는 일세를 풍미한 검객이자 예술가, 병법가였던 미야모토 무사시가 만년을 보내며 세계3대 병법서의 하나인 <오륜서>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성벽 모서리가 일본도처럼 서슬 퍼렇게 날이 서있는 구마모토성. 우리에게는 임진왜란의 ‘원흉’이지만 일본에서는 ‘축성의 귀재’로 존경받는 가토 기요마사의 치밀한 설계가 놀랍다. 옹성처럼 에워싼 첩첩의 성벽을 뚫고 가장 안쪽에 있는 천수각까지 진격하려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페리를 타지 않고 아리아케해를 북쪽으로 우회한다면 자동차로 2시간반은 걸릴 것이다. 페리에서 내리니 구마모토 시내로 가는 버스가 바로 연계된다.
구마모토에 온 것은 개인적으로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어서다. 임진왜란 때의 잔혹한 선봉장이었던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가 다이묘로 있으면서 쌓은 구마모토성은 히메지성, 나고야성과 함께 일본의 3대 명성(名城)에 꼽힌다. 가토는 성곽의 설계와 축성에 귀재로 불리는데, 나고야성, 오사카성, 히젠 나고야성이 모두 그의 설계로 만들어졌다. 17세기를 산 전설적인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는 만년을 구마모토에서 보냈고 그의 무덤도 있다. 규슈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라는 스이젠지 죠주엔(水前寺成趣園)도 궁금했다.
구마모토 시는 인구 74만으로 규슈에서는 후쿠오카(153만), 기타큐슈(97만)에 이은 3위 도시다. 나가사키가 항만을 낀 좁은 계곡에 불규칙적으로 시가지가 형성되었다면, 구마모토는 널찍한 들판에 질펀하게 퍼져 있어 인구보다 훨씬 크게 느껴진다. 나가사키처럼 시내에는 노면전차가 다닌다. JR선 외에 2, 3호선이 있는데 옛날 그대로의 복고풍 전차와 세련된 디자인의 최신형 전차 두 가지가 섞여 있다.
시내로 들어오니 이미 시간이 늦어 역 근처에 예약해둔 숙소에 들었다가 다음날 아침, 스이젠지 죠주엔부터 찾았다.

 

 

교토~도쿄 옛길을 형상화한 정원
정원은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쉬는 곳이라야 할텐데 일본의 전통정원에 들어서면 오히려 긴장이 된다. 너무나 치밀하고 인공적으로 계산된 조형에 한걸음 한걸음이 조심스럽다. 그나마 스이젠지죠주엔은 규모가 크고 개방감이 들어 좀 덜한 편이다.
구마모토 하면 구마모토성과 스이젠지죠주엔 두 곳을 꼽을 정도로 상징적인 곳이다. 1636년 이 지역을 다스리던 호소카와 가문의 3대 영주인 호소카와 타다토시(細川忠利)가 스이젠지(水前寺)를 건립한 것을 시작으로 정원은 4, 5대 영주에 이르기까지 3대 80년에 걸쳐 완성했다. 장구한 시간과 엄청난 공역이 들어간 정원인데 이름부터 격조 높다. 죠주엔(成趣園)이라는 이름은 5세기초 중국의 자연시인 도연명(陶淵明)의 대표작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왔다. 현실을 벗어나 소박한 귀향을 노래한 귀거래사에는 “정원을 날마다 거닐어 취미가 되었다(園日涉以成趣)”는 구절이 있다. 도시 한가운데 철저히 인공적인 정원을 꾸미면서도 현실을 벗어나는 탈속감을 추구한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한 후 화려하고 귀족적인 모모야마(桃山) 문화가 꽃을 피울 때 특히 건축과 정원에 큰 영향을 미쳐 현대까지 이어지는 초석을 이루게 된다.
정원에 들어서면 큰 못에 비친 듬성듬성 식재된 소나무가 우아하다. 그 사이로 한눈에 보아도 후지산을 빼닮은 원추형 조산(造山)이 시선을 끈다. 호수는 시가현의 비와호(琵琶湖)를 모티브로 했고 호반의 산책로는 교토에서 에도에 이르는 옛길과 53군데에 모여 있던 여행자 숙소인 도카이도(東海道) 고쥬산츠기(五十三次)를 상징한다. 참으로 절묘한 구상이다. 일본의 핵심 지역이 이 정원 하나에 축소되어, 혹은 형상화되어 다 담겨 있는 셈이다.
연못 가운데는 두 개의 작은 인공섬이 징검다리로 이어져 있다. 못은 길이 180m, 폭 50m 정도로 상당히 큰 편이다. 시내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지만 외곽에는 숲이 띠를 이뤄 빌딩이 시선을 침범하지 않는다.
못가에 서 있는 고킨덴쥬노마(古今傳授の間) 건물은 질박한데 기품과 위용이 대단하다. 갈대지붕인데도 한껏 각을 세우고 칼날처럼 다듬어 육중한 차분함을 자아낸다. 이 건물과 후지산 조산 그리고 극도로 섬세하게 다듬어진 수목이 다시금 긴장감을 옥죄어 온다. 일본 정원에서는 아무래도 몸도 마음도 편할 수가 없다.
가만히 보면, 이런 정원 형식은 우리에게 낯이 익다. 바로 부여 궁남지나 경주 안압지에 그 원형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674년 축조된 안압지는 길이 200m, 폭 80m 정도로 정원의 구성과 형식이 스이젠지죠주엔과 거의 비슷하다. 일본의 정원은 초기에는 백제에게서, 삼국통일 이후는 신라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대조적인 것은, 일본은 치밀한 구조의 인공미로 발전했다면 우리는 안압지나 비원 등에서 보듯이 인공미를 최소화하면서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쪽으로 발전했다는 점이다. 일본 정원은 보기는 아름답고 인상적이지만 마음이 어딘가 불편하다면, 우리의 정원은 보기에는 수더분하지만 마음이 편안해진다고나 할까.
 

 

임진왜란의 저주 
그런데 구마모토의 번주는 임진왜란의 선봉장이던 가토 기요마사 아닌가. 거의 같은 시기인데 스이젠지는 호소카와 번주가 조영했다니 이건 어떻게 된 일일까.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임진왜란의 주역을 몇 명 추리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필두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네 사람을 들 수 있다. 아무런 명분 없이 평화롭게 지내던 이웃나라를 침략해 엄청난 피해를 입힌 죄과일까, 히데요시는 그럭저럭 62세까지 천수를 누렸지만 그의 아들 히데요리는 22세에 생모(요도기미)와 자살해 대가 끊어지고 만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히데요시 사후 벌어진 천하양분의 결전인 세키가하라 전투에 서군(히데요리 파) 편에 섰다가 패배, 처형되었다. 다행히 동군 편에 섰던 가토 기요마사는 구마모토 지역의 영주가 되어 승승장구 하는 듯 했지만 아들 대에 들어 내분에 휩싸여 영지를 몰수당해 가문의 위상이 크게 추락했다. 구마모토가 호소카와 가로 넘어간 것도 이 때였다.
유키나가와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때도 선봉의 공을 다투며 경쟁 겸 갈등의 관계였는데 세키가하라 이후에도 둘의 라이벌 관계는 대대로 전승된다. 하지만 기요마사의 위상이 훨씬 높게 여겨지는 것은 그가 승리한 동군의 편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히데요시, 유키나가, 기요마사 세 사람은 당대 아니면 2대에 가서 운이 다한다. 정유재란 때의 선봉장이던 구로다 나가마사만이 후쿠오카 지역의 번주가 되어 대를 이어 번성하는데, 그는 권력의 향배를 냄새 맡는 천부적인 재주가 있었다. 이런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굵지는 않지만 ‘잘게’ 살아남기 마련이다.

가토 기요마사의 두 얼굴 
솔직히 일본성 앞에 서면 경외감을 감출 수가 없다. 16~17세기에 이처럼 전략적·미학적으로 대단한 성취를 해낸 일본에 감탄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한국과 중국에서는 이런 전투 시설이 퇴색할 때 일본은 절정을 구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마모토성 앞에서 나는 한층 감탄과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오사카성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전율에 복잡한 심상까지 뒤섞여 최종적으로는 좌절감이 찾아온다. 이 엄청난 성을 1607년에 완성한 것이 감탄스럽고, 설계와 축성을 지휘한 이가 한국인이라면 잊을 수 없는 ‘왜적’ 가토 기요마사라는 사실이 탄식을 부른다. 무지막지하고 잔인한 왜장으로 알려진 가토 기요마사에게 이런 능력과 안목이 있었다니…. 용서할 수 없는 적장이지만 괄목상대하게 된다. 히메지성, 나고야성과 함께 일본 3대 명성이라는 찬사가 과장이 아니다.
우선 거대하다. 바깥쪽 성벽은 높이가 20m에 달해 육중한 위압감을 준다. 물이 빠진 해자 바닥에서 치면 가장 높은 성벽은 무려 30m나 되어 일본성 중 최고다. 해자까지 가로막고 있는 저 성벽을 넘어 함락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실전의 경험도 있다. 메이지유신의 공신이었으나 기존 사무라이 계층을 대변하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신정부에 대항해 일으킨 세이난전쟁(西南戰爭 1877) 때였다. 그는 규슈를 석권하며 승승장구 했으나 이 구마모토성만은 함락하지 못했다. 당시 다카모리는 1만4천의 군사로 관군 3천400이 지키는 구마모토성을 포위, 52일간이나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지만 끝내 함락에 실패했다. 4배의 군사로도 이 철옹성을 깨트리지 못한 것이다. 다카모리는 “기요마사공과 싸우는 것 같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성 바깥에 서서 보니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엄두가 나지 않을 것도 같다.
일본성은 터 잡은 지형에 따라 평지에 세운 평성(平城), 낮은 산지와 평지를 한데 아우른 평산성(平山城), 산 위에 구축한 산성(山城)으로 구분한다. 대부분 평성이나 평산성이고, 평산성이라고 해도 원래 있던 산을 깎아내 만든 경우가 많아 평지에 쌓은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나라는 고려 이전에 만든 성은 대부분 높은 산지에 쌓은 산성이고, 마을을 둘러싼 평지의 읍성(邑城)은 조선시대에 주로 축성되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전술은 전쟁이 나면 방어력이 좋은 인근의 산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하는 방식이었다.
일본도 백제식 산성이 처음 도입된 7세기부터 16세기 중반까지는 한반도와 유사한 산성이 구축되었지만 본격적인 전국시대가 도래하고 중세 유럽의 성곽형식이 알려지면서 마을 중심의 평지나 언덕에 영주가 거주하는 성곽을 만들기 시작해 곧 16세기말~17세기초에 걸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도심에 남은 일본성의 원형은 16세기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유럽 성에 못지않은 규모와 방어력을 목표로 건설한 아즈치성(安土城)과 기후성(岐阜城)으로 일본성 혁명의 시작이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축성의 귀재’로 소문 나 있어서 오사카성, 나고야성, 히젠 나고야성 등 수많은 거성을 설계하거나 수축하는데 앞장섰다. 일본 3대 명성 중 나고야성과 구마모토성 두 곳이 그의 ‘작품’이니 일본 최고의 성곽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축성 기법은 조선에서도 빛을 발했는데, 울산에 남아 있는 왜성(학성)이 바로 그것이다.
1597년 기요마사는 전진을 포기하고 40일만에 이 성을 쌓고 근거지로 삼았다. 그해 12월 4만7천의 조명연합군의 포위공격을 받지만(기요마사 군대는 1만5천) 물과 식량이 떨어진 상황에서 악전고투를 벌인다. 증원군의 도움이 있기는 했지만 조명연합군은 우세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성을 함락하지 못했다. 포위 도중 일본군 원군이 가세해 조명연합군은 철수했지만 기요마사 역시 성을 버리고 퇴각해 실질적으로는 조명연합군이 승리한 전투였다. 이때의 기억은 기요마사에게는 뼈저린 악몽으로 남아 구마모토성 축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성벽은 화포 공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더욱 높고 견고하게 쌓았고, 폭 30m 정도의 넓은 해자를 팠다. 성벽의 둘레는 5.3km, 면적은 98만㎡(약 30만평)에 달했다. 출입문은 복잡하게 꾸몄고 성벽의 모퉁이 마다 거대한 망루를 세웠다.
울산성 농성 때 물과 식량이 떨어져 시체 썩은 물은 물론 소변과 말의 피를 마셨던 기억을 되살려 성내에는 우물을 120개나 파고, 만약의 경우 비상식량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고구마 줄기로 다다미를 짰다. 은행나무를 많이 심은 것도 은행을 비상식량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이 때문에 구마마토성의 별칭이 은행나무성(銀杏城, 킨난조)이다.
보통 성곽의 모서리에 설치하는 망루는 1~2층이 대부분인데 구마모토성은 웬만한 성의 천수각에 맞먹는 3~5층짜리 망루를 5군데나 세웠다. 중심 건물이자 가장 높은 천수각은 대소 이중구조로, 지상 6층, 지하 1층 규모다. 대천수각은 석축 위의 건물 높이만 32m, 소천수각은 19m다. 석축높이 16m를 더하면 대천수각은 48m로 가장 높은 오사카성 천수각(55m)에 필적한다. 천수각은 1877년 세이난전쟁 때 소실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1959년 복원된 것이다.
중앙에는 2중 천수각이 주위를 압도하고 외곽에는 다층 망루가 늘어선 모습은 지금 봐도 일대 장관이다. 검은 성벽과 건물벽에 하얗게 띠를 두른 듯한 처마선의 회벽은 강렬한 흑백대비로 시야에 묵중한 잔상을 남긴다. 서슬 퍼런 일본도처럼 날이 선 성벽 모서리와 선명한 흑백 대비라인은 위협적으로 보이기 위해 착용했던 왜장의 가면 같다. 군령이 서지 않고 훈련되지 않은 오합지졸 군사라면 성의 외관만 보고도 기가 죽고 말 것이다. 가토 기요마사의 후예들은 이제 이 성을 보러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먹고 살고 있으니 나의 심사는 더 복잡하다.

 

 

미야모토 무사시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 1582~1645)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아주 오래전이다. 어렸을 때 김제 출신으로 ‘극진가라테’를 창시해 세계적인 무도가로 명성을 날린 최배달(최영의, 1923~1994)의 일화를 담은 만화를 흥미진진하게 보았는데, 거기서 최배달은 무도 인생에서 가장 존경하고 큰 영향을 받은 인물로 미야모토 무사시를 꼽았다. 최배달은 일본 전국의 무도 강호들을 차례로 물리친 것은 물론 세계 각국의 무술 고수들과 겨루는 등 100여번의 실전 대결에서 모두 승리했다. 도쿄 외곽의 무사시노에서 1:100의 대결을 펼친 것을 비롯해 목숨을 건 대결을 계속한 족적은 상당 부분 미야모토 무사시의 행적과 겹치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미야모토 무사시에 대해서는 소설과 영화, 만화 등이 수없이 나와 있고 지금도 재생산된다. 나도 최배달의 얘기를 기억 속에 두었다가 일본 소설과 만화로 미야모토 무사시를 다시 만났다. 그런 미야모토 무사시가 말년을 구마모토에서 보냈고 무덤도 여기에 있다. 무덤이라도 한번 보고 싶어 복잡한 길을 묻고 물어 찾아갔다. 무덤은 JR 호히혼센(豊肥本線) 무사시즈카(武藏塚) 역에서 700m 지점에 있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일본에서도 가장 존경받고 인기 높은 검객으로 ‘검성(劍聖)’으로 받들어진다. 전국시대 말기에 태어나 최후의 난세를 몸으로 겪으면서 성장해 검술과 전투는 그에게 필생의 과업이자 숙명이었다. 오카야마에서 몰락한 무사의 아들로 태어난 무사시는 본래 이름이 신멘 무사시(新免武藏)였으나 아버지의 성을 버리고 고향마을 미야모토(宮本)를 성으로 썼다고 한다.
거구에 완력이 대단했던 무사시는 아버지에게서 검술과 무술을 배워 겨우 13세에 아리마 기헤이라는 유명한 무사를 쓰러뜨려 일약 유명해졌다. 17세에는 하급무사 신분으로 세키가하라 전투에 서군으로 참전했다가 동군에 패했으나 운 좋게 목숨을 건져 도망쳤다. 이후 무사시는 전국을 떠돌며 유명한 무사들과 겨뤄 승리하며 명성을 쌓는다. 교토에서는 당대 최고의 검술로 명예를 누리고 있던 요시오카(吉岡) 가문에 도전해 형제를 모두 이겼고, 복수에 나선 요시오카 도장의 수백명과 결투를 벌인다. 이것이 유명한 ‘이치조지(一乘寺) 소나무 아래에서의 결투’다. 수백명과 싸웠다는 것은 무사시의 양아들인(무사시의 친자는 없었다) 미야모토 이오리(宮本伊織)가 무사시 사후 4년 뒤에 세운 비문에 나오지만 다소 과장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29세 때는 역사에 남을 명승부를 벌이는데 시모노세키 앞바다에 있는 간류지마(巖流島)에서 무사시와 쌍벽을 이루며 명성이 높았던 천재 검객 사사키 코지로(佐々木小次郎)와 벌인 결투였다. 무사시는 노를 깎아 만든 무겁고 긴 목검으로 장검을 사용한 코지로를 일격에 쓰러뜨려 ‘살아있는 전설’이 된다. 이후에는 결투를 벌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34세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가담해 오사카 여름전투에 참전했고, 57세에는 기독교도와 농민들이 일으킨 시마바라의 난 진압을 위해 양자인 이오리와 함께 출전해 전투 현장에는 꼭 있었다.
당시는 이미 도쿠가와 막부가 자리를 잡아 평화시대로 들어섰는데 웬 검술이고 결투인지 궁금할 수 있다. 평화가 찾아오고 전투가 없어지자 전국시대에 활약했던 무사들의 설 자리가 갑자기 없어졌다. 일부는 행정관리로 변신해서 영주의 보호 아래 지위를 유지했지만 일자리를 잃은 무사들은 생계를 위해 검술도장을 운영하거나 로닌(浪人)이 되어 각지를 떠돌며 자신을 고용해줄 영주를 찾아 헤매야 했다.
로닌들은 이름을 알리기 위해(그래야 높은 몸값을 받을 수 있었다) 온갖 노력을 다한다. 기괴한 복장을 하거나 이상한 무기를 사용하기도 하고 ‘도장 깨기’와 결투로 세인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무사시도 나름의 연구 끝에 장도 다치(太刀)와 단도 와키자시(脇差)를 각각 한손에 쥐고 함께 사용하는 니텐이치류(二天一流)를 창안해 실전에서도 유효하게 활용했다.
사무라이는 원래 크고 작은 칼 두 자루를 휴대하는데, 싸울 때는 큰 칼을 사용하고, 작은 칼은 근접전이나 암살, 할복 등에 사용했다. 하지만 무사시는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몸에 지닌 무기와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고 보았고 두 자루 칼을 같이 쓰는 것이 공격과 방어에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실전에서도 한 칼로 방어하고 다른 한 칼로 공격해서 이긴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일반인은 이것이 쉽지 않았는데 큰 칼은 무게가 1kg을 넘어 한 손으로 마음대로 휘두르기에는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다. 무사시는 “훈련을 하면 두 칼을 자유자재로 놀릴 수 있다”고 말했다.
전투는 사라졌지만 칼은 여전히 무사들의 상징이었고 전투가 사라진 대신 심신을 연마하는 수단으로서 검도(劍道)가 체계화되었다. 무사시는 전국시대의 끝에서 에도막부의 초기에 이르는 과도기를 살면서 실전과 연구로 ‘검도’의 길을 닦아 검도의 성인(聖人)이 되었다.
 
 

 

세계3대 병법서, <오륜서>
무사시가 검성으로 불리는 것은 그가 칼만 아는 단순한 검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실전에서 패배를 모르는 최고의 검객이자 병법가이면서, 작가, 예술가이자 구도자의 삶을 살았다. 한마디로 대단히 복잡하고 섬세하며 다양한 인물로 쉽게 단정하기 힘든 내공의 소유자였다.
새 그림을 잘 그렸고 조각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일부 그의 작품은 국보로도 지정되어 있다. 만년에 쓴 병법서 <오륜서(五輪書)>는 그가 평생을 닦아온 검술과 병법,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력을 모은 필생의 역작이다. 지금은 중국 춘추시대 손무의 <손자병법>, 독일의 군사학자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과 함께 세계 3대 병법서로 인정받을 정도로 위상이 대단하다.
무사시는 <오륜서>에서 개인간의 결투에 요긴한 검술을 자세와 동작, 심리 측면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개인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무사시가 “진정한 병법은 모든 영역에 적용된다”라고 말한 것처럼 이는 대규모 군사를 동원한 전투는 물론 현대의 ‘비즈니스 전쟁’에도 해당된다. 때문에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는 <오륜서>를 필독서로 삼고 있다고 한다.
<오륜서>에서 무사시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구체적인 기술보다 마음가짐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상심을 중시했는데, 생사가 걸린 결투를 벌일 때도 평상심을 유지하면 어떤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언행에서는 선불교 분위기가 진하게 느껴진다. 실제로 무사시는 20세 무렵에 선종의 일파인 임제종 선사 아래에서 선을 수행한 적이 있다. 이는 그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며, <오륜서>의 이름도 불교에서 우주의 5대 원소로 꼽는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을 상징하는 오륜탑(五輪塔)에서 따왔다. 책 내용도 각 장을 지의 권(地之卷), 수의 권, 화의 권, 풍의 권, 공의 권 으로 나누고 있다. 그만큼 무사시가 선에 깊이 빠져 있었음을 말해준다.
무사시는 <오륜서>를 말년을 보낸 구마모토에서 저술했다. 무사시가 구마모토에 정착할 때까지는 자신의 실력에 맞게 대우해줄 영주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제안이 들어와도 자신이 기대하는 녹봉에 크게 미치지 못해 자존심상 거절해오다가 결국 구마모토 영주였던 호소카와 타다토시(스이젠지 죠주엔을 축조한 인물)의 초대를 받아 빈객으로 머물게 된다. 300석의 봉록과 17명을 고용할 수 있는 양곡도 추가로 받았다. 정식 가신이 아닌 빈객으로는 대단한 대우였다. 이때 무사시는 지역 무사들을 지도하고 제자들을 양성했다. 당시 그의 문하생은 1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1643년에는 구마모토성 인근에 있던 집을 떠나 근교의 긴보산(金峰山)에 있는 레이간도(霊巌洞) 동굴에 거주하며 자신의 검술과 병법을 종합한 <오륜서>를 저술한다. 64세로 죽기 며칠 전에 <오륜서>와 함께     <독행도(獨行道)>라는 글을 제자에게 남겼다. <독행도>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무사시 인생의 좌우명으로, 제자들에게도 지침으로 삼도록 전한 것이다. 내용은 상당히 놀랍다. 모두 21개 조인데, 철저한 금욕을 추구하고 사리사욕을 멀리하며 관용을 넘어 달관의 경지를 말하고 있다. 몇 가지만 소개한다. 

- 육체적인 즐거움을 삼간다
- 몸은 가볍게 세상의 이치는 깊게 생각한다.
- 매사에 후회하지 않는다.
- 선악에 대해 남을 원망하지 않는다.
- 이별을 슬퍼하지 않는다.
- 연정을 갖지 않는다.
- 매사를 좋거나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 부처님과 신(神)을 존경하나 의지하지 않는다.

이것만 보면 세상과 담을 쌓고 철저한 무소유와 금욕을 기본으로 하는 수도승의 규율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부처님과 신을 존경하나 의지하지 않는다’ ‘매사에 후회하지 않는다’ 두 가지다. 17세기 동양인에게 이런 정신세계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계몽시대를 거쳐 개인주의의 자각과 더불어 이성과 과학의 지적 축적이 충분해야 가능한 근대적 지식인의 세계관이 바탕에 깔려 있다. ‘부처님과 신을 존경하지만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을 거침없이 하는 400년 전 인물의 생각에는 그저 감탄하고 놀랄 뿐이다. ‘홀로 가는 길’이라는 뜻에서 지은 <독행도>의 의미와 목표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미야모토 무사시, 그는 검객이라기보다 무(武)와 예(藝), 선(禪)을 체화해서 궁극의 경지까지 고양시킨, 시대를 앞서 간 영혼이었다.
그의 무덤에는 양손에 두 칼을 쥐고 머리가 벗겨진 만년의 무사시 동상이 서 있다. 눈은 부리부리하고 강건하게 선 자세는 발밑에 뿌리를 내려 대지를 움켜쥔 듯 영원한 부동이다. 칼은 쥐었지만 그에게서는 무사의 살기보다 달마의 선풍(禪風)이 감도는 것만 같다.
문득 우리에게는 이와 비슷한 역사적 인물이 없었을까 되묻게 된다. 역시 전쟁이 횡행하던 한반도의 전국시대였던 삼국통일전쟁기에 그런 인물이 많았다고 생각된다. 대표적으로는 김유신이 떠오른다. 화랑의 수장인 풍월주 출신의 김유신은 평생 50여회의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불패의 무장이었다. 그보다 내게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선덕여왕 시절 상대등 비담이 반란을 일으켜 대치하는 도중 별똥이 서라벌 시내로 떨어져 여왕이 죽거나 왕군이 패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 모두들 공포에 떨고 있을 때 그가 한 말이다. 홍수가 나거나 한발이 들면 하늘이 노했다고 자연재해를 신격화해서 두려워하던 1400년 전 그 시절, 김유신은 왕과 신하들 앞에서 믿을 수 없는 얘기를 했다.
“별이 떨어지는 따위를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는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거나 절벽에서 바위가 떨어지는 것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 그저 우주의 한 사건일 뿐입니다. 인간사의 길흉이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사람 하기에 달렸을 뿐입니다. 옛날 은나라의 폭군 주왕은 상스러운 붉은 공작이 나타났는데 나라를 잃었고, 노나라는 길한 영물인 기린을 얻고도 약해졌습니다. 결국 사람의 덕이 요상한 것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조금도 근심하지 마십시오.”
ㅡ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시대와 나라를 달리하지만 세상을 앞서가는 선구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당연히 고독 속에 자신의 세계를 구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독하다고 영웅일 수는 없지만, 영웅은 고독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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