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여 축하하오, 애마야 고맙구나!

차백성의 인문탐사기행
이베리아 반도를 넘어 북아프리카까지
드디어 ‘환희의 언덕’
순례자여 축하하오, 애마야 고맙구나!

산티아고의 몬테 도 고소(Monte do Gozo)라는 작은 언덕은 순례길의 완주를 상징하는 ‘환희의 언덕’이다.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하면서 수백 년 잠자던 산티아고 순례가 기지개를 켠 곳이다. 800km의 대장정을 마무리 하며 붓다가 득도의 기쁨을 조용히 음미했듯이 완주의 감동을 가만히 되새긴다. 이제 스페인도 대단원이다. 다음은 바스코 다 가마와 마젤란의 나라, 포르투갈이 기다린다. 애마야,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순례길 최후의 포인트 몬테 도 고소. 여기서 산티아고 대성당까지는 한시간 거리

 

산티아고 순례길과 더불어 북부여행도 끝물이다. 길고 길었던 ‘에스파냐’와도 작별을 고할 때가 가까워졌다. 떠난다 생각하니 미련이 남는다. “이제는 포르투갈이다, 무엇이 또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다소 위안이 된다.
남은 여정,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산티아고를 향해 힘찬 페달을 돌리기 시작했다.

루고는 위험한 도시?
루고(Lugo)는 순례자들에게 종착지를 앞둔 마지막 도시이다. 산티아고가 멀지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긴장을 풀면 지나온 한 달여 고행이 도로(徒勞)가 될 수도 있다.
루고 중심거리 카페에서 독일에서 온 젊은 순례자와 커피를 한잔 나누었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순례자들이 고통이 극에 달해 주저앉고 싶을 때, 그곳이 바로 여기라고 해요.”
나는 이런 말을 해주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려움에 직면해 좌절할 때, 그때가 인생의 정점에 가까워졌다는 신호죠.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이 궁리 저 궁리 다 시도해도 안 될 때 그때가 목표 달성 직전입니다.”
그는 내말에 공감한 듯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는 밝은 표정으로 “당케 쉔, 브엔 카미노!(감사하고, 좋은 순례 되세요!)”하고는 힘찬 발걸음을 옮겼다.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된 로마 성벽
루고에서 산티아고까지 도보 순례자에게는 3, 4일이 소요되지만 나는 하루거리다. 이러니 ‘자전거 순례’가 얼마나 좋은가! 도보순례에 비한다면 말이다. ‘스피디 하면서도 아름다운 풍경들이 눈과 가슴으로 들어온다. 숨이 멎을 듯한 업힐도 있지만 반드시 짜릿한 다운힐에서  보상을 받는다.
‘여행의 깊이는 이동수단의 속도와 반비례 한다’는 말이 있다. 이에 따른다면 걷는 것이 가장 좋지만 현실적으로 너무 늦고 힘이 많이 든다. 내리막길에서는 보상은커녕 힘이 더 든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걷기’와 ‘자동차’ 사이에 낀 ‘자전거’가 가장 이상적인 순례수단 아닐까. 물론 이것은 나의 변(辯)이기는 하지만….
인구 10만 정도의 루고에서 볼거리는 단연 ‘로마 성벽(The walls of the Roman era)’이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 오래된 구조물을 둘러싼 모든 길은 잘 가꾸어진 산책로와 통해있다.
3세기에 처음 축조되어 높이 13m, 길이 2200m, 85개의 견고한 탑이 남아 세계에서 로마 성벽 중 가장 잘 보존되었다는 찬사를 듣는다. 성벽뿐 아니고 도시외곽에 있는 수도교(水道橋) 역시 로마제국의 유산이다. 마드리드 교외 세고비아(Segovia)에 있는 수도교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잘 보존되어있다. BC 15년, 루쿠스 아우구스티(Lucus Augusti)가 로마를 통치할 때, 해발 500m의 이 지역을 거점도시로 조성했다니 무척 역사가 깊다.

루고의 명물, 로마 성벽
과거 루고에 물을 공급하던 로마식 수도교

 

“하수구에 버려야할 법적 폐기물”
서유럽을 여행할 때도 그랬지만 이번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그 옛날 강대했던 로마제국의 흔적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로마는 이탈리아 외에 방대한 영토를 프로빈키아(Provincia,屬州)라는 이름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총독이나 집정관을 파견하여 19세기의 제국주의 식민지 시기보다 더 혹독하게 다스렸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 시대에는 강력한 로마 통치력에 근거해 제국 전역이 로마법이라는 통일된 법체계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 시기에 수도교와 포장도로로 상징되는 놀라운 공학적 발전에 힘입어 교통 등 사회기반 인프라가 프로빈키아 구석구석까지 연결되었다.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지방  ‘프로방스’ 는 프로빈키아(영어로는 Province) 시대의 명칭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런 대제국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나. 허물어지기 시작하면 철옹성 제국도 순식간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거의 모든 나라들이 잿더미가 되었을 때 홀로 잘나가던 미국, 불과 70여년 만에 부활한 신흥 강국, 중국의 맹렬한 추격에 직면해있다. 세계를 호령하는 초강대국도 긴 역사의 흐름으로 보면 한때 유행처럼 ‘이 또한 지나가리라’인가….
어쨌든 ‘집터’를 잘못 잡은 우리나라는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살아 남기위해서는 어느 가락에 춤을 출 것인지를 잘 선택해야만 한다. 11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지금의 남북분단이라는 현실은 그때보다 더 풀기 어려운 숙제다.
자유 시장경제가 지배하는 지구상에서 ‘이데올로기’ 논쟁은 벌써 검증이 끝나 하수구에 폐기처리된 지 오래건만, 한국의 일부 인사들은 왜 아직까지 버리지 못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민족의 핏속에 면면히 흐르는 분열과 반목의 DNA가 있다면 이것은 운명이다. 한 개인에게도 운명이 있듯 한 국가도 국운이 분명 존재한다. 지도자 운(運)부터 관계국 지도자 운에 이르기까지. 먼 이국땅에서 한국의 현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온다. 이 가슴앓이는 해외여행 때마다 도지는 나의 고질병이기도 하다.

드디어 ‘환희의 언덕’에!
몬테 도 고소(Monte do Gozo)란 야트막한 언덕에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한 기념비가 서있다. 사실 교황 방문을 기점으로 수백 년 잠자던 산티아고 순례가 기지개를 켰다. 초기 순례의 목적은 이슬람 정복자에 대항하여 기독교 세력의 결집이었다.    국토를 되찾은 1492년 이후부터 순례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 언덕에 도착하면 순례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고소’는 갈리시아 말로 ‘환희’이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이 부근 대형 알베르게에서 하룻밤 휴식을 취하며 흥분을 가라앉힌다. 그리고 몸을 정갈하게 하고 그간의 노정(路程)을 정리한다. 이튿날 아침 출발해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오전미사를 드린다.
보통 산티아고라 불리는 순례길의 종착지인 이 도시는 인구 8만의 갈리시아의 주도(州都)이자 행정은 물론 문화의 중심지이다. 정식 명칭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는 ‘별이 점지한 성인 야고보의 시신이 묻혀있는 땅’이란 뜻이다. 콤포스텔라는 라틴어의 ‘별의 땅(campus stellae)’에서 왔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로마에 이어 가톨릭 성지답게 대성당을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다. 고풍스런 중세 냄새가 물씬 난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종교박물관 같은 인상을 받았다. 물론 구시가지 이야기다. 뭐니 해도 이 도시의 아이콘은 ‘산티아고 대성당(Catedral de Santiago de Compostela)’이다. 이곳은  순례길을 걸어온 순례자의 최종목적지이다. 서쪽 땅끝 마을인 피스테라까지 가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짧게는 100km에서 길게는 800km까지, 순례자든 여행자든 갖가지 사연을 안고 오직 이곳을 목표로 온 사람들이다. 발에 물집이 생겼다 터지고 다시 생겨 피범벅이 되며, 심하면 발톱이 빠지는 아픔을 감내하며 찾아온 곳이다. 

유유상종, 자전거 순례자를 만나면 반갑고, 할말이 많다. 말은 잘 안통해도


성당 앞 광장은 환희의 물결
많은 사람들이 ‘일등공신’ 발(足) 사진을 찍고 있었다. 거기에는 ‘영광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성당 앞 ‘오브라도이로 광장(Plaza Do Obradoiro)’은 거의 일년 내내 기쁨의 환호성과 춤사위로 감동의 물결이다. 순례자라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뜨거운 포옹으로 무사안착의 기쁨을 나눈다.
자전거 라이더라면 타고 온 자전거를 번쩍 들어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극적 순간에 ‘이 포즈’는 라이더에게는 기본이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없었다. 자전거가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다. 어쩌랴… 그래도 말썽 한번 부리지 않고 묵묵히 역할을 다해준 모터와 배터리, 그리고 ‘애마 Velostar’에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식사’가 부족할 때 애마는 움직이기를 거부해 나를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모른다. 50kg이 넘는 ‘탱크’를 내 육신의 힘만으로 움직이기는 버거웠다. 가끔이었기에 망정이지….
어떤 수단이든 고생의 시간이 길수록 완주의 기쁨은 배가될 것이다. 광장에 있던 일반 관광객조차도 순례자에게 따스한 위로의 축하의 눈빛을 보내는 것이 참 보기 좋았다. 산 넘고 물 건너 800km를 걸어서 완주한다는 것, 과연 어떤 느낌일까. 나 역시 그들에게 찬사의 박수를 보냈다. 

산티아고 대성당 앞 광장은 감동의 한마당이다
완주한 순례자의 기쁨! 이리도 좋을까!
미국에서 온 노부부 자전거 순례자
완주의 기쁨, 재회의 기쁨! 며칠전 만났던 자전거 순례자들을 대성당 사무국에서 다시 만났다

 

대성당의 명물, 향로(香爐)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그 어떤 성당보다 규모도 크고 장중한 분위기이지만, 수많은 방문자, 특히 막 도착해 흥분이 진정되지 않은 순례자들로 소란스럽기는 하다. 그래도 ‘포용의 전당’에서는 찌푸리거나 화내는 사람을 볼 수 없었다.
중앙제단(Altar Mayor)이 위치해있는 작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13세기에 만들어진 야고보의 조각상이 나왔다. 포옹이나 입맞춤으로 성은(聖恩)을 받으려면 상당한 인내심을 가지고 긴 줄을 기다려야한다. 조각상에서 왼쪽으로 나와 좁은 계단을 내려가니 야고보의 시신이 안치된 묘지(Cripta Apostolica)가 있다.
성당 천장에 걸린 향로(botafumeiro, 보타푸메이로, 연기 방출기)는 이제 이 성당의 명물이 되었다. 역사는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과거의 순례자들은 성당에서 먹고 자며 긴 순례길의 고단함을 풀었다. 그땐 목욕은 물론 옷 세탁도 제때 못해 성당 안은 악취가 진동했을 것이고, 이나 벼룩, 병균 등도 옮겨왔을지 모른다. 탈취(脫臭) 및 소독용도로 시작했으니 순례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요즘은 전통으로 굳어져 이것을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역사적인 전통이나 관습은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어, 오랜 세월 연륜의 나이테를 쌓아 굳어짐을 새삼 느낀다.
현재 성당에는 두 개의 향로가 남아있다. 은도금 놋쇠로 제작된 향로에 향을 가득 채우면 무게가 100kg까지 나간다. 이것을 사제 몇 명이 줄을 밀고 당겨 진자(振子) 운동을 하게 만든다.  그 각도가 수직면에서 최대 82도까지 올라간다. 내려오면서 가속도가 붙어 지면에서 최단거리 즉, 최고속도는 시속 68km에 이른다. 그러면 향(연기)이 성당 내부에 고루 퍼진다. 어린 시절, 둥근 달 아래 돌리던 쥐불놀이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
1499년과 1622년 두 차례 향로가 떨어진 적이 있다고 한다. 인명 피해는 알려진 바 없으나 요즘 미사 중에 떨어진다면 대형사고일 것이다. 근래에는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날, 야고보의 축일(祝日)인 7월 25일에 ‘향로행사’를 한다.

산티아고 대성당의 야고보 상과 유명한 청동향로
대성당 지하에 야고보의 시신이 안치된 관

 


‘걷는 자’와 ‘자전거 탄 자’
나는 국내의 제주 올레길이나 여타 둘레길에서 걷는 자와 라이더 간에 크고 작은 마찰이 있다고 들어 왔다. 그래서 이번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양측의 관계가 어떤지 궁금증이 일었다. 순례길에서는 인종과 출신 나라, 나이 등의 벽을 넘어 ‘같이 순례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친구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도보 순례자와 자전거 순례자 사이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도 궁금증의 확실한 해소를 위해 나는 도보 순례자 여럿에게 물어보았다.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같이 긍정적이었다.
“각자의 형편에 따라 택한 것이니 나는 당신이 어떤 수단이든지 간섭할 생각이 없어요.”거의 이런 식이었다. 역시 서구인다운 개인주의적 대답이었다. 허나  ‘힘센’ 자전거가 양보 하는 것이 지구촌의 인지상정이다. 
내가 먼저 “브엔 카미노!(Buen Camino, 좋은 순례길 되세요!)” 혹은 “브에노스 디아스!(Buenas Dias, 좋은 아침!)” “그랐샤스!(Gracias, 감사!)”라고 인사하며 속도를 확 줄여 앞서나가면 바로 등 뒤에서 화답이 들려왔다. 그렇지 않고 아무 말 없이 시속 20km 정도로 먼지를 일으키며 추월한다면, 그것도 여러 대가 그런다면 어떤 ‘걷는 자’ 가 인상을 찌푸리지 않겠는가! 순례의 피크 시기인 7, 8월에는 어쩔 수 없는 갈등도 있을 것이다.
이제 자전거 순례자도 전 순례자 중 12%가 넘는다. 라이더로서 최소한의 매너는 꼭 지켜야 한다. 그리고 하나 더, 한국인 순례자 중에 농작물 서리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자랑스럽게     블로그에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절대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매너 문제가 아닌 엄연한 절도행위로 처벌 대상이다.
나는 해외 투어 중 앞쪽 핸들바에는 태극기를 달고, 뒤에는 그 나라 국기를 달고 다닌다. 그 나라 국기는 여행국의 법과 규칙을 존중하겠다는 뜻이고, 태극기는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과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나와의 약속이기도 하다. 

홀로 숲길을 걷는 순례자. 어딘가 쓸쓸해 보인다
순례길에 있는 오아시스. 값이 저렴하다

 

순례, 오직 이슬람교만이 계율로 정해
많은 현대인들은 치열한 삶의 무한 경쟁에 지쳐있다. 성직자를 제외한 일반 신자라면, 무심히 반복되는 상사(常事)에서 점점 희미해져 가는 신앙심을 되찾고, 세속적인 욕망의 늪에서 영혼의 순수성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성지순례를 통해 영혼을 정화하는데 큰 의미를 두게 되었다. 어떤 종교든 종교의 발상지나 성인의 무덤 혹은 발자취를 따라 순례여행을 떠나는 심정은 거의 비슷하다. 독실한 신자라면 이를 통해 구원을 향한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다지고 싶을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의 목적은 크게 보면 이렇다. 순례자는 사제나 종교인은 1% 미만이고, 종교적 신념 특히 구교도는 50% 정도로 추측된다(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인들을 포함한 유럽인들이 대부분이다). 나머지는 인생의 전환점, 힐링, 도전, 여행, 체력단련 등이었다. 아무리 돈독한 신앙심이 있더라도 기독교는 순례를 강요하지 않는다.
세상의 많은 종교 중 이슬람교만 유일하게 평생에 한번은 메카를 순례토록 엄격히 계율로 정하고 있다. 이슬람교는 ‘평화’는 강조하지만 ‘자비’란 개념은 없다. 도둑질하면 가차 없이 손목을 자른다. 초범은 왼 손목, 재범은 오른쪽 발목, 즉 대각선으로 형을 집행한다.
아랍어로 순례를 ‘핫지’라고 한다. 앞에 관사 ‘알’을 붙여 ‘알하지’라고 하면 ‘순례를 다녀온 사람’이란 뜻으로 존경의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순례의 일등공신은 역시 발이다
낡고 헤진 신발이 고통의 여정을 말해준다

 

스페인 순례길 vs 일본 순례길
순례 길을 달리며 떠오른 한 생각이 그때와 자꾸만 오버랩되었다. 그때란 수년전 일본 시코쿠(四國)를 여행하며 ‘일본 불교 순례길’을 자전거로 달렸을 때 말이다. 예수와 부처, 인류의 대스승을 따르는 순례자 심정은 거의 비슷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동서양의 순례방식을 비교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아 그때 기억을 더듬어본다.
일본 불교 순례길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보다 역사가 더 깊다. 일본인들은 실용적이며 모방을 잘한다. 이런 기질로 인해 서구문물을 빨리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고는 더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모방과 변신의 귀재’라고 졸저 <재팬 로드>에 쓴 바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 함은 꼭 오래된 자기 것을 버리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보다 옛것에 더 집착하고 전통을 귀히 여긴다. 비근한 예로 대를 물린 100년이 넘은 우동집이 일본에는 무수히 많다. 막부시대의 향수일까, 현(縣)의 경계에 아직도 곳쿄(國境, 국경)로 쓰인 팻말이 도처에 서있다.
일본인들은 예로부터 여행을 즐기는 편이다. 계절에 따라 무리지어 움직이기를 좋아한다.  봄에는 하나미(花見)라 하여 만개한 벚꽃을 찾아다니며, 밤이 되면 요자쿠라(夜櫻) 속에서 화견주(酒)를 즐긴다. 여름에는 하나비(花火, 불꽃놀이)를 쏘아 올리며 열광하고, 가을에는 단풍명소마다 행락객이 넘쳐난다.
에도시대에 서민들 사이에 헨로(遍路, 순례)가 유행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코보다이시(弘法大師, 774~835)의 흔적을 따라 시코쿠(四國)내 88개 사찰을 돌아보는 것이다. 시코쿠는 홍법대사의 고향이다. 그는 28세에 출가해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806년 ‘신곤슈’(眞言宗, 일본 밀교 종파의 하나)을 창시했다. 법명은 ‘구카이(空海)’였다.
이 ‘오헨로’는 일본 불교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순례길이다. 사찰은 카가와 현 23개, 에히메 현 26개, 고치 현 16개, 도쿠시마 현 23개로 총 88개. 거리는 1300km에 이르고 보통 두 달 정도 걸린다. 한번에 88사찰을 다 도는 경우도 있지만, 현(縣) 별로 나누어 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시코쿠의 88사찰 순례
사찰에는 1번부터 88번까지 고유번호가 붙어있다. 순번이 아니라도 각자 형편에 따라 해도 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순서를 지킨다. 획일성은 일본인들의 속성 중 하나다.
순례 복장과 준비물은 다음과 같은 전통이 내려온다. 우선 ‘하쿠이’라는 흰옷을 입어 번뇌에서 벗어난 깨끗한 모습을 한다. 여기에 목에 걸어 가슴에 드리우는 ‘와게사’라는 약식 가사를 걸친다.  머리에는 삿갓을 쓰고 한손에는 염주, 다른 손엔 ‘콘고즈에(金剛杖, 지팡이)’를 쥔다. 그리고 순례 서류가방이라 할 수 있는 ‘즈다부쿠로(頭陀袋)’를 어깨에 멘다. 
사찰에서의 순례절차는 사찰의 대문격인 산문에서 본당을 향해 일 배 한다. ‘미즈야(水屋)’라는 샘터에서 국자처럼 생긴 긴 손잡이 컵으로 물을 떠 입과 손을 깨끗이 씻는다. 이 대목은 이슬람교도와 유사하다. 물이 귀한 사막에서도 예배 전 얼굴과 목, 손발을 씻는 정화행위는 불문률이다.
그 다음 순례자는 종루에서 종을 쳐 도착을 알린다. 본당 앞에서 향을 피우고 촛불을 켜고, 납찰 상자에 인적사항과 소원을 적어 새전과 함께 넣는다. 합장과 독경이 이어진다. 홍법대사가 있는 대사당(大師堂)에서도 본당에서와 마찬가지로 합장과 독경을 한다. 납경소에 들러 약간의 돈을 헌금하고 납경장에 ‘방문증명도장’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산문에서 다시 본당을 향해 일 배하고 절을 떠난다. 
88개 사찰을 다 돌면  납경장에  커다란 붉은 도장을 찍어 순례가 끝났음을 증명해 준다.  마지막 사찰인 88번 오쿠보지(大窪寺)에 그동안 분신 같았던 지팡이와 삿갓을 바친다.

일본 시코쿠 88사찰 순례
시코쿠 88사찰 순례자와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없는 탁발(托鉢)
순례자들은 구카이의 영험이 자신에게 내리기를 바라며 힘든 길을 다닌다. 홀로 다니는 자도 ‘도교니닌(同行二人)’이라 하여 홍법대사가 수호신처럼 늘 함께한다고 믿는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은 한 중년 여인이 있다. 먼저 떠나간 아들의 슬픔을 이기지 못해 영정사진을 들고 순례 중이었다. 내가 “고인의 명복을 빌고 순례를 무사히 마쳐 마음의 안정을 찾기 바란다.”고 했더니 고맙다고 여러 번 허리를 굽혔다.
우연의 일치인가, 내가 만났던 순례자들은 산티아고 순례자와 거의 비슷하게 ‘종교’ ‘비종교’의 비율이 반반 정도였다. 비종교란 재충전이나 은퇴 기념, 인생의 전환점 등에 의미를 둔 사람들이다.  숙박은 슈쿠보(宿坊, 사찰 안에 있는 숙소)나 민박, 노숙 등 최소한의 경비로 다닌다.  금주는 기본이니 인내가 필요한 여정이다.
시코쿠 사람들은 순박하여 국적, 인종, 성별, 빈부에 관계없이 순례자들에게 호의적이다.  이를 ‘오세타이(お接待)’라 하며 음식이나 약간의 돈을 희사한다. 거절하면 예의가 아니다. “오헨로 상, 오세타이데스. 도오조!(순례자님, 약소하지만 받으세요!)” 그들 간에 오가는 대화가 자주 내 귀에도 들어온다. 탁발의 일종으로 보면 된다. 일반 여행자에게도 보시하니 나도 이에 편승(!)하여 시코쿠 사람들의 순박함과 친절이 아직도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이들이 내게 건넨 것은 한 점 물질이 아니고 인간적인 말, 따듯한 눈길이었다.

그때의 충격이란!
지구반대편 스페인 땅 순례길 바닥에서 하필 일본생각이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없는 것에 대한 부러움과 일본은 넘지 못 할 벽이라는 한계성 때문일 것이다. 나는 세계 어디를 여행하든 떠오르는 것, 한국와 일본 비교는 ‘습관성’이 된지 오래다.
물론 제주도 올레길 걷기가 국민적 공감대를 이루면서 각 지자체별로 둘레길 조성이 붐을 이루고 있긴 하다. 그러나 외국에서 이를 목표로 오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시코쿠 사찰 순례길에서 한국인을 비롯 유럽, 동남아 사람들과도 심심찮게 조우하곤 했는데 그때의 충격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치욕의 역사가 오늘은 효자
참 부러웠다. 이번 여행길에서도 엄청난 수의 관광객이 스페인 각지를 여행하는 것을 직접 보니 말이다. 먹고 마시고 길에 뿌리는 돈이 한국인만 해도 일 년에 얼마나 될까!  ‘굴뚝 없는 산업’ - 지금 스페인의 관광수입은 엄청나다.
남부는 안달루시아 지방 일대에 흩어져있는 아랍의 유산들을 ‘스토리’라는 고운 옷을 입혀 내놓으니 전세계에서 알아서들 찾아온다.
한 예로 알람브라 궁전을 보자. 수개월 전 인터넷으로 예약해야만 입장할 수 있다. 집시 등 부랑아의 소굴이었던 그곳이 미국의 수필가 워싱턴 어빙이 쓴 <알람브라 이야기>와 클래식 기타리스트 프란시스코 타레가의 <알람브라궁전의 추억>으로 지금은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관광명소가 되었다. 이것이 가져다주는 경제효과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북부는 순례길이라는 종교로 무장한 관광 자원이 버티고 있다.
현대인들이 갈망하는 ‘Slow Life’와 맞물려 전세계에서 오는 순례자 수는 증가일로다. 이러니 스페인은 전 국토가 관광지가 되었고 이 낙수효과가 옆 나라 포르투갈에도 미치고 또 서로 상승작용을 하여 전 이베리아 반도로 확산되었다.
어쩌면 치욕의 역사일 수도 있는 700년 아랍 정복자들의 유산, 그리고 그 정복자들을 몰아내기위해 결집했던 산티아고 순례가 오늘날 이렇게 효자노릇을 톡톡히 할 줄은 아랍 말발굽 아래 있던 그땐 결코 몰랐으리라.

‘스토리’는 만들기 나름
길은 삶의 공간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후 피폐해진 국가 부흥을 위해 국토를 가꾸어 관광 사업에 공을 들였다. 그 예로 ‘테마가 있는 길’을  많이 만들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드레스덴까지 괴테와 관련된 ‘괴테 가도’, 하이델베르크에서 프라하까지 전설이 살아 숨 쉬는 ‘고성(古城) 가도’, 알프스 휴양지를 연결하는 ‘알펜 가도’, 하나우에서 브레멘까지 그림형제 동화의 흔적을 따라가는 ‘메르헨 가도’ 등이다. 이 길들 중 대표적인 것은 남부 퓌센에서 뷔르츠부르크까지 약 400km에 이르는 ‘로맨틱 가도(Romantiche Strass)’이다. 나 역시 ‘길’을 달리기 위해 독일을 찾았다.
세계 3대 ‘썰렁 관광 명소’가 있다. 여러 곳을 여행하다 보면 가이드북에 침이 마르도록 마사여구로 쓰여 있는데 실제로 가보면 실망스럽기가 그지없을 때가 있다. 라인 강변의 로렐라이 언덕과 코펜하겐에 있는 인어 상.
나머지 하나는 그중 대장격(?)인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꼬마 오줌싸개 동상(Mannekin Pis)이었다. 1619년에 세워졌으니 역사는 오래되었다. 이 꼬마의 이름은 줄리앙(La Petit Julien)이다. 이 녀석은 옷이 많기로 웬만한 유명배우 저리가라다. 미키마우스, 엘비스 프레슬리 복장에서 한복까지…. 1698년 네덜란드 총독을 시작으로 국빈이 벨기에를 방문하면 동상에 옷을 입히는 행사가 관례가 되었다. 우리 전직 대통령 한분도 예쁜 한복을 선물한바 있으니까.
각설하고, 여기에 전해오는 스토리가 있다. 여러 가지지만 두 개만 소개한다. 줄리앙이 마녀의 집 앞에 몰래 오줌을 싸자 화가 난 마녀가 마법을 걸어 동상이 되었다는 설. 또 다른 이야기는 꼬마가 전쟁터에 나간 아버지를 찾아다녔다. 한창 피아(彼我)가 대치중인 한복판에서 꼬마가 오줌을 누자, 양진영에서 웃음보가 터지고 전투가 중단되었다는 것. 이후로 줄리앙은 평화의 사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스토리’를 만들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다.
내가 브뤼셀에서 이것을 처음 보았을 때 깜짝 놀란 것은 크기가 너무 작았다. 60cm 남짓하니 말이다. 사실 크기가 무슨 문제이랴, 그것이 창출하는 유무형의 부가가치가 대기업 몇 개 합친 만큼 엄청난데!

갈리시아 주의 소도시. 북부지방에서 보기 힘든 아랍식 건물이다

 

뚝심의 아이디어맨, 자전거 순찰대를 창설하다
나는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문화적 아이콘으로 무장한 스토리텔링의 흡인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절감하면서도 절망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도 곳곳에 이야기꺼리가 널려 있기 때문이다. 헌데 ‘우리 것’이라 하여  별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이제는 깨워야할 시간이 왔다.
현재 본지(本誌)에 연재 중인 ‘한국의 강둑길’이란 지면이 있다. 라이더요 독자라면 이 면을 여러 번 접했을 터이고, 치안감까지 지낸 필자의 이력도 익히 알 것이다. 자전거 매니아인 그는 충남경찰청장 재직 시 경찰 최초로 자전거 순찰대를 조직, 운영했다.
수직명령 조직 하에 ‘선구자’는 외로웠을 것이다. 울산지방경찰청장으로 퇴임 후에도 저술과 강연 활동으로 현역 때보다 더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시인이자 여행작가인 조용연, 그는 나와 자전거를 매개로 인연을 맺은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같이 동호회 활동을 한다지만, 나는 그가 자랑스럽기도 하거니와 넉넉한 마음씨, 그리고 무엇보다 배울 점이 많아 좋아한다.
6년째 한 번도 거르지 않는 월간지 연재가 보통 일인가! 그간 개인적 애경사(哀慶事)나 폭우 폭설에 태풍, 혹한에 혹서… 얼마나 장애물이 많았을까. 목표를 세우고 거르지 않는 근면함만이 아니다.
그가 그동안 다닌 길들이란 우리 전 강토에 신경망처럼 얽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 그의 자전거에는 팔도 흙이 다 묻어있을 것이다. 강변은 물론 영(嶺), 봉(峰), 치(峙)에서 피어났다 사라진 역사, 지리, 인물, 풍물, 사건, 전쟁, 설화, 전설, 문학, 가요 등의 이야기를 발로 뛰어 발굴해 내고 있다.
그가 쳐놓은 촘촘한 그물코에 피라미 새끼 한 마리 빠져 나갈 수 없다. 원류(源流)까지 찾아가 저간의 스토리를 ‘사정없이’ 풀어내는 재능의 소유자이다. 이는 일상에서 접하는 평범한 것들에 대해 ‘왜 그럴까?’ 라는 의심을 해보는 습관 때문이다.

‘박사마을’과 풍수지리를 연결시킨다면
그의 ‘의심’이 낳은 몇 가지 사례를 인용해 본다.
내륙에 자리 잡은 안동이 왜 간고등어 명산지로 이름을 얻었는지, 또 수많은 생선 중에 유독 고등어만 ‘한손(두 마리)’ 단위로 파는지 밝혀낸다.
의암호 건너 춘천시 서면(西面) ‘박사마을’ 같은 곳은 풍수지리와 연결하여 스토리텔링의 옷을 입힌다면 관광객들이 많이 찾을 수 있다. 한승수 전 국무총리를 비롯 주민 수 대비 박사를 대량으로 배출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아름아름 알려져 그 마을에서 소중히 여기는 석물이나 장소의 기(氣)를 받아 가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비단 국내뿐 아니고 일본, 중국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은 특히 그런 민담과 속설에 귀를 기울일 것임에 틀림없다고 단언했다.
한강의 중류, 충주 탄금호(湖)는 신라의 악성(樂聖) 우륵의 전설과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이 ‘배수의 진’을 친 훌륭한 스토리가 있다. 게다가 세계무술축제가 열리는 무대인데다  ‘택견 전수관’까지 있어 동양의 마샬 아트(martial art, 무술)에 관심 많은 외국인들이 짧게나마 직접 배워 볼 수도 있다. 

“아름다운 항구, 삼천포로 푹 빠지세요!”
나는 무엇보다 그의 이 이야기가 가슴에 파고들었다. 박학다식이 더 나은 것이 아니라, 세상에 없는 아이디어를 창조했기 때문이다. 그는 경남 가화천(진주 남강댐에서 삼천포 바다로 흘러가는 지천)을 기행하며 삼천포에 대해 그의 저서 <빽 없는 그대에게>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2016년, 비엘 프레스 刊.  일단 제목부터 발칙하다).
“이제  남해의 작은 항구 삼천포는 사천시의 한 부분이 되고 말았다. 삼천포 주민들이 요구하여 개명했으니 어쩔 수 없다. 본질에서 벗어나 엉뚱한 방향으로 빗나간 상황을 빗대어 하는 말이 ‘삼천포로 빠졌다’니 이 지역주민들이 싫어할 만도 했다. 이 황당한 비속어(卑俗語)가 삼천포에 드리운 이유는 이랬다. 경전선과 진삼선(진주-삼천포) 열차 환승 착오에서 비롯된 것이다. 진주 개양역에서 갈아타라는 안내방송을 잘못 알아들어 진주, 순천으로 갈 승객이 그만 삼천포로 가곤했다는 것이다.”
답답해서 추론해보지만, 그 유래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생각을 바꿔보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미성(美聲)의 은방울 자매, ‘국민 누님가수’들이 부른 <삼천포 아가씨>,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비 내리는 삼천포에 부산 배는 떠나간다.
어린 나를 울려놓고 떠나가신 내 님이시여
돌아와요 네, 삼천포 내 고향으로~

노랫말에 담긴 로망은 유혹이다.
“어서 오세요”라는 젊은 아가씨의 부드러운 손길이 살짝 스치듯 와 닿는 느낌이다.
남해고속도로 어디쯤엔가 <아름다운 항구, 삼천포로 푹 빠지세요> 라는 대형 광고탑을 세운다면 삼천포 주민들이 화를 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지역경제를 발전 시켜야하는 사천시 공무원들 정신이 번쩍 들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시대가 변했다. 보신에 급급하여 무사안일주의를 지향하는 공무원은 이제 ‘장수’하지 못한다.
운전하던 여행객들이 “우와~ 저 표현 죽인다!” 하며, 바로 핸들을 돌려 삼천포로 오지 않을까!
 

오줌싸는 꼬마, 브뤼셀. 썰렁1
라인강변의 로렐라이. 명성대비 썰렁 2
코펜하겐 인어공주상. 명성대비 썰렁 3

 

시도하자, 긴 안목으로!
관점을 바꾸기는 쉽다. 그건 누구나 다한다. 그러나 ‘확’ 바꾸기는 어렵다. ‘삼천포로 빠진다’는 저급한 표현에 맞서 ‘우리 모두 아름다운 항구 삼천포로 푹 빠져 봅시다!’라고 정면 돌파한다면 ‘스토리텔링 역사’에 한 획을 그을 것이다. 큰돈, 오랜 시간, 엄청난 공이 들어가지 않아도 하나의 작은 변화, ‘섹시한 카피’한 줄은 의외로 큰 결과를 창조해 낸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불교 색채가 짙다. 전국에 무수한, 유서 깊은 사찰과 암자가 흩어져있다. 역사적으로 일본 불교는 우리를 통해 건너간 것은 모두 아는 사실(史實)이다. 그리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승려들이 목숨을 걸고 호국대열의 선봉에 섰다.
우리도 하루 빨리 한국불교의 사찰루트나 짧은 역사지만 기독교 성지 순례길을 만든다면 어떨까. 불자와 개신교회와 가톨릭성당 모두를 아우른다면, 우리국민 반절은 넘을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성격이 다른 두 루트를 복합시켜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여기에 63개의 국가하천을 네트워크로 엮어 저간의 사연들을 ‘스토리텔링’이라는 고운 옷을 입힌다면! 굳이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쏟아가며 스페인으로, 일본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
그러면 국토사랑과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테마에 걸맞는 목표가 있다면, 걷는 자든 자전거 탄 자든 이 팍팍한 시대에 행복한 성취감을 담뿍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늦었다고 생각 할 때가 가장 적절한 시점이다. 

산티아고 대성당 사무국에서 순례증명을 받고, 로마 교황청에서 온 기자와 자전거 순례자로서 소회를 인터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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