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청옥산(1256m) 육백마지기

 평창 청옥산(1256m) 육백마지기
이 여름 폭염도 미치지 못한, 까마득한 하늘 위 별세계

바로 옆 가리왕산(1561m)에 가려 낮아 보이지만 그래도 해발 1256m나 되는 청옥산이다. 정상 일원에 펼쳐진 고위평탄면은 옛날부터 밭으로 개간되어 ‘육백마지기’로 불린다. 지금은 고랭지배추밭과 풍력발전소가 한가롭고 길이 잘 뚫려 있어 승용차도 쉽게 드나든다. 남동릉 기슭을 따라 올라가는 길은 대협곡의 조망을 펼쳐주고, 정상에서 미탄면소재지까지 고도차 950m, 길이 11.6km의 다운힐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점핑하듯 순식간이다  

 

해발 1200m 높이에 있는 육백마지기 전망대. 남릉을 따라 기둥높이 80 m, 날개 길이 40m의 거대한 풍력발전기 15기가 허공을 가르고, 오른쪽으로는 서릉과의 사이에 대협곡이 패어 있다. 상공에는 촬영 중인 드론이 떠 있다

 

산중이 아니라 산상(山上)의 별세계다. 해발 1200m의 고지에 이런 평지가 있다니! 옛날부터 개간을 하고 ‘육백마지기’라고 부른 이유를 알만하다.
그냥 해발 1200m의 고위평탄면이 아니라 완연한 이국풍이다.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느릿느릿 돌아가고 그 아래로는 고랭지 채소밭과 초원이 펼쳐져 있어 알프스의 어느 산자락에 선 것 같다. 승용차도 어렵지 않게 올라오면서 탈속감은 떨어지지만 새하얀 바람개비와 녹색의 대비는 천상의 별세계를 이룬다. 이곳은 평창 청옥산(1256m)이다. 

 

동릉 임도에서는 가끔 조망이 트여 스케일이 큰 협곡을 내려다볼 수 있다. 건너편으로 남릉의 풍력발전기가 보인다

 

쉽게 올라서는 1200m 고지
강원도에서도 산악지대의 절정을 이루는 평창은 계방산(1577m)과 오대산(1563m), 가리왕산(1561m)의 3대 1500m급 고봉이 중심을 이룬다. 청옥산은 가리왕산 남서쪽에 가까이 접하고 있어 1256m나 되는 높이에도 존재감이 떨어진다. 크게 보면 가리왕산 산군의 한 봉우리로 간주할 수 있는 위치다.

상공에서 보면 청옥산은 아주 특별하게 생겼다. 정상에서 남쪽으로 남릉이 흘러내리고, 이 남릉 좌우에서 동릉과 서릉이 둥글게 에워싸고 있다. 자연스럽게 남릉과 동·서릉 사이에는 두 개의 큰 계곡이 패였고, 이런 지세는 전통 풍수지리에서 좋은 형국으로 꼽는 형태로 미탄면소재지가 소위 명당에 해당한다.
높고 큰 산들로 하늘이 겨우 트인 이 두메산골은 평창에서도 오지에 속했다. 미탄면(美灘面)도 원래는 산간오지에 숨겨둔 군량창고가 있었다는 뜻의 미창(米倉)에서 유래했다. 

산은 높지만 험준하지는 않아서 산정의 고위평탄면인 육백마지기는 오래 전부터 개간되었을 것이다. 마지기는 한 말(斗)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면적으로 논밭에 따라,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지만 100~200평 정도다. 600마지기면 6~12만평인데, 실제 정상 일원의 평탄면은 5만평 정도 된다.
이제 산 남쪽의 창리에서 출발해 동쪽 협곡으로 올라 정상을 거쳐 서쪽 협곡으로 내려올 것이다. 미탄면소재지인 창리는 해발 300m 정도. 고도차가 1000m에 육박하는 거창한 업다운이 될 것이다. 올라갈 때는 좋은 길 대신 정개산(851m) 북쪽의 임도로 우회한다. 조금은 멀리 힘들게 올라 육백마지기를 접하는 감흥을 점증시키고 싶다. 

 

정개산 북쪽을 돌아가는 임도 주변에는 산딸기가 지천이다
해발 800m 등고선을 오르내리는 동릉 임도 구간
정상 직하에서 시작되는 고도차 950m, 길이 11.6km의 장쾌한 다운힐은 한동안 풍력발전기를 따라 가다가 저 아래 인간세상으로 순식간에 떨어져 내린다

 


길찾기 복잡한 정개산 북쪽 업힐
당일 일정이라 창리에서 이른 점심을 들고 출발한다. 평창읍에서 10km를 더 들어가는 창리는 그야말로 첩첩산중에 기적 같이 작은 들판을 이룬 극단의 분지다. 둔중하게 퍼진 청옥산은 창리에서는 정상 부위를 알아보기 어렵다. 

미탄초교를 기점으로 마을을 벗어나 평안리 방면으로 동쪽 협곡으로 진입한다. 협곡의 초입은 아주 좁아서 안쪽에 꽤 넓은 대지가 있는 것이 상상되지 않는, 전형적인 우복동(牛腹洞) 지형이다. 3.4km 올라가면 ‘대목이’ 마을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는데 여기서 우회전하면 천천히 경사가 가팔라지면서 본격적인 업힐이 시작된다. 이제부터 갈림길이 몇곳 나와서 길 찾기에 유의해야 한다. 육백마지기로 곧장 오르는 도로를 만나기까지 13.3km의 농로와 임도 구간의 시작이다. 

‘대목이 표지석’에서 1.4km 올라가면 다시 삼거리이고 200m 후에 또 삼거리가 거듭 있는데 두 곳 다 우회전한다. 길은 빤하지만 통행이 드물어 노면이 거칠고 길가에는 탐스러운 산딸기가 널려 있다. 대목이 표지석에서 3.1km 올라가면 숲을 베어낸 꽤 넓은 경작지가 나오지만 더 이상 작물을 재배하지 않는 듯 잡초투성이다. 이제 길은 비포장에 돌까지 불거져 점점 거칠어진다. 700m 더 가면 다시 경작지가 나오고 사람이 상주하지 않는 민가가 있다. 해발 710m 지점으로, 민가 옆 수도에서 맑고 시원한 물이 콸콸 쏟아져내려 폭염에 열이 오른 머리와 목을 축인다. 드론 촬영을 위해 최승호 지바이크 대표도 동행했는데 폭염과 거친 노면에 고역을 치르는 중이다. 다행히 이제 200m만 더 가면 편안한 산기슭 임도가 기다린다.

 

동릉의 조망점에서 바라본 장쾌한 조망. 산허리를 깎아드는 임도 라인 뒤편으로 청옥산 정상부가 아스라하다

 

대협곡의 위용
해발 800m 등고선을 오르락내리락 달리는 임도는 노면 상태가 좋고 간간히 협곡 쪽으로 조망을 틔워준다. 동서 협곡을 나누는 남쪽 능선의 1081m봉과 동릉 사이에 패인 협곡의 스케일은 대단하다. 남릉을 따라 백색 풍력발전기가 하늘을 휘젓고 그 아래 드문드문 잠긴 산간마을이 현실과 비현실의 묘한 경계선 같은 느낌을 준다. 

이윽고 육백마지가 방면으로 창리~평안리에서 곧장 올라오는 도로와 만나지만 아스팔트로 포장만 되었을 뿐 경사가 대단하다. 2단 어시스트에 최저단으로 천천히 오르는 수밖에 없다. 도중에 대형 단군상을 모신 종교시설을 지나면 곧 주능선 삼거리다. 오른쪽은 육백마지기로, 왼쪽은 서쪽 협곡으로 내려간다. 하산길에는 서쪽 협곡으로 다운힐 할 것이다. 

삼거리에서 육백마지기까지는 비포장길이지만 노면이 좋아 승용차도 어렵지 않게 다닌다. 몇구비를 돌아 해발 1100m 정도에 이르자 마침내 육백마지기의 비경이 파노라마처럼 확 펼쳐진다. 초입의 경작지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듯 잡초만 무성하고, 바로 저편에 풍력발전기 사이로 무던한 정상이 보인다.
육백마지기는 이미 관광지가 되어 있다. 널찍한 데크 전망대와 하트 모양의 조형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고 주차장에는 캠핑카가 여러 대 서 있다. 가장 높은 곳에 선 풍력발전기는 정상 바로 아래의 해발 1210m 지점에 있는데 여기에도 대형 캠핑카 2대가 머물고 있고 팔각정에는 이미 사람들로 만원이다. 1200m 고지를 이처럼 편하게 올라서 안락하게 캠핑할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 여기 말고는 함백산 아래 만항재(1290m) 일대뿐일 것이다.

 

육백마지기 남쪽의 삼거리. 여기서 육백마지기까지는 비포장이다
표지석 하나 없는 청옥산 정상. 숲속에 묻혀 조망은 트이지 않는다

 

숲에 가린 정상, 이제는 다운힐이다!
마지막 풍력발전기에서 5분만 숲길을 가면 정상이다. 돌출되지 않고 평평한 정상은 숲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표지석도 없이 철제 안내판만 서 있을 뿐이다.
정상을 내려와 천상의 별세계를 이룬 육백마지기에서 한참을 보냈다. 최승호 지바이크 대표가 드론으로 나와 이 이사를 촬영하느라 오가기도 했지만 산 아래보다 5~6도 기온이 내려간 선선한 공기 속에서 이 산중 별세계를 깊이 경험하고 싶었다. 폭염에 의한 습기와 미세먼지로 조망은 신통치 않았지만 대신 근경(近景)에 더 집중할 수 있는 기회도 된다. 

능선을 따라 일렬로 도열한 거대한 풍력발전기는 이미 목가풍의 상징이다. 기계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 느껴지는 것은 원형의 흰색으로 허공의 바람과 노니는 동화적인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바람이 머릿결을 날리지 않아도 저 높은 허공에는 공기의 흐름이 있다는 것을 무언으로, 윙윙~ 하는 얕은 소음으로 귀띔해준다.
이제는 고도차 950m, 길이 11.6km의 거창한 다운힐이 기다린다. 올라올 때는 2시간 이상 걸렸지만 내려가는 건 15분이면 될 것이다. 이 허망하고 극단적인 대비가 언제나 산을 그리게 만들고, eMTB를 사랑하게 해준다. 

육백마지기 내부의 흙길은 타이어의 큼직한 트레드가 만들어내는 먼지를 뒤쪽으로 휘날리며 쾌속으로 내달린다. 앞서 남릉 삼거리부터는 아스팔트 도로지만 서쪽 협곡(회동리)으로 내려서는 길은 헤어핀의 연속이다. 구비를 돌 때마다 브레이크는 비명을 지르고 순식간에 떨어지는 고도는 뺨에 느껴지는 온도차를 선명하게 해준다.
페달링 한 번 않아도, 모터가 돌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시속 60~70km로 달리게 해주는 이 내리막의 희열은 지구에 중력이 작용하는 한 자전거의 영원한 매력으로 남을 것이다.

 

알프스 기슭을 방불케 하는 육백마지기(사진 최승호)
한때 고랭지밭이던 육백마지기는 상당 부분이 잡초에 묻혔다. 오른쪽 풍력발전기 두 대 사이의 봉긋한 부분이 청옥산 정상이다

 

 

여 정
서울에서 자동차로 2시간30분 거리여서 수도권에서 충분히 당일치기가 가능하다. 다만 길찾기와 업힐이 부담스럽다면 창리에서 평안리를 거쳐 곧장 육백마지기로 오르는 것이 좋다. 정개산 임도로 들어설 경우 길찾기에 유의하고 잡초에 다리를 보호할 수 있는 긴 바지를 추천한다. 서쪽 협곡으로 올라 동쪽으로 내려와도 무방하다. 창리에 숙박 업소와 식당이 여럿 있다. 식당은 토종닭으로 요리한 백숙과 닭볶음탕 전문의 영춘가든(033-334-9933 미탄면 서동로 3591-10)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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