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선비정신도, 6·25의 핏물도 함께 흐른다

낙동강2 (안동·예천·문경·의성·상주·선산·구미·칠곡)
조선의 선비정신도, 6·25의 핏물도 함께 흐른다

안동이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수많은 서원과 종가의 기품이 낙동강가에서 생겨나고 이어졌다. 안동 껑꺼이의 질박한 마음이 오래도록 반가를 지키고, 플라스틱 시대에 안동포의 명맥을 이어간다. 경북도청이 옮겨 앉은 안동은 이제 굳건한 경북의 중심이다. 물맛 좋은 예천, 삼백의 도시 상주, 마늘밭 풍성한 의성을 한 바퀴 돌아 흘러가는 낙동강은 칠곡에 들어선다. 1950년 늦여름 시산혈하(屍山血河), 그 지옥의 왜관전투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또 6월이 돌아오니 아프게 견뎌야 한다

강물은 벼랑에 부딪혀 울 때마다 한 박자 쉬고 돌아가며 훨씬 어른스러워 진다

 

낙동강(유로연장 510.36km, 유역면적 23,384.21㎢)
-  ‌국가하천 :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 ~ 낙동강하구둑(외곽선)
- 지방하천 : 강원 태백시 화전동 용수골 ~ 낙동강(국가하천기점)
- 발원지 : 태백시 황지
- 최장발원지 : 태백시 화전동 싸리재, 천의봉(1443m) 북동 능선 근처
- 지류 : 781개 지류 하천(대한민국에서 제일 많음)
〔한국하천일람, 2012. 국토교통부〕

 

이제 5대강 종주의 마지막 코스로 접어든다. 낙동강이다. 태백에서 출발하여 안동댐까지는 이태 전에 여행을 하고 접어둔 상태다. 많은 이들이 찾는 영남의 아랫녘은 남겨놓았다.
안동역은 낙동강 본류와 길안천, 반변천이 더해져 기세등등해진 낙동강 여정의 출발지로 제격이다. 노래 한 곡의 힘으로 안동역은 풍성해졌다. 높다랗게 새로 지은 역사가 아니어서 정겹기도 하다. 노래비에 적힌 가사를 다시 천천히 읽어 본다. 

바람~에~~ 날~려 버린~ 허무한 맹~세였나~/ 첫눈이 내리는 날 안동~역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한사~람~/ 새벽부터~ 오는 눈~이~ 무~릎까지 덮는데~/ 안오는 건지~ 못오는 건지~ 오~지 않는 사람아~~/ 안타까운 내 마음만 녹고 녹는다~~/ 기적소리 끊어진~ 밤에~~
(‘안동역에서’ ― 김병걸 작사, 최강산 작곡, 진성 노래)

역시 ‘사나이 눈물’, ‘찬찬찬’ 등 2000여곡을 지어낸 작사가 김병걸의 솜씨는 빼어나다. 안동에서 학창을 보낸 그는 ‘한방에 훅 간다’고 노랫말을 짓는 시대에 트로트의 정수를 보여준다. 부안 사람 진성을 명예안동시민으로 만들어준 불세출의 노래이자 만년 밤무대 가수 신세를 그야말로 한 방에 날려 버렸다. 이제 노래방 1위 국민가요가 되었다.
안동이 과우지(寡雨地)지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우리나라 평균보다 비가 적게 내리는 안동에 무릎까지 눈이 내리는 일이야 흔할까마는 대중가요의 상상력과 경쾌한 리듬은 그 정도 과장쯤이야 그냥 밟고 넘어간다. 덕분에 안동 여행객들은 노래비 앞에서 인증셔터를 누르고, 찜닭골목의 매상은 덩달아 올라간다.

안동역에서 떠나는 낙동강 또 한 토막
안동대교를 건너 낙동강 남쪽 길로 접어들면 남후면이다. 낙동강은 하회에 이르기까지 80리 길에 두어 번 몸을 크게 뒤튼다. 천혜의 물돌이동이 들어설 자리 수하동 앙실마을이 온통 공장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골재회사, 환경처리장, 쓰레기매립장까지 골칫거리는 강 건너로 밀쳐버렸다. 바로 안동시외버스터미널 건너편 이야기다. 그 아까운 천혜의 절경이 관청의 비좁은 안목으로 그렇게 뭉그러졌다. 낙동강자전거길만 엉뚱하게 산길에 더부살이 신세를 면키 어렵게 되었다. 

중앙고속도로가 건너는 풍산대교를 지나 단호교 근처 마애솔숲유원지를 지나는 동안 갑갑했던 마음을 걷어 올린다. 아직 내 키를 조금 넘는 제방의 벚나무들이 우거지고 나면 이 길은 강변의 고요를 더욱 감싸 안을 것이다. 한가한 길에서는 향토의 물산과도 말을 나눈다.

안동 간고등어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초립 쓴 간잽이 이동삼 장인이다. 간고등어(사투리로는 ‘간고디’라고 함)가 내륙에 자리 잡은 내력은 다 아는 이야기다. 그가 배 따 놓은 생물 고등어에 소금을 치는 솜씨는 예술이다. 원래 한 마리로는 팔지 않는 ‘한 손’이라는 두 마리 단위는 고등어 말고 다른 생선에선 본 적이 없다. 한 마리로는 그 기막힌 맛에 도무지 견딜 수 없어 ‘한 손’ 단위가 생겨난 것이리라.

부산어시장에서 가장 큰 고등어는 무조건 안동간고등어 몫이다. 원래 비늘이 없는 생선 ‘무린어(無鱗魚)’는 제사상에 올리지 못하는 것이 법도지만 안동에서만은 예외다. 그 귀한 고등어자반을 생전에 맛있게 자셨을 어르신을 생각하면 가례제절도 눈감아 줄만했다. 이젠 틀니에다 지팡이 신세를 면치 못하는 할매들이 새댁 시절, 상투 튼 할배 밥상 기웃거리는 새끼들 고등어 한 토막 못 주고, 등뼈를 기준으로 덜 드신 걸 뒤집어 덥혀 저녁 밥상에 다시 올려야 했던 가난이 지긋지긋하기도 했으리라. 이제 어획량이 나날이 줄어든 연안고등어는 ‘국민생선’이란 말이 무색하게 값이 올라 그 자리를 노르웨이 빙하 고등어에게 내줄 판이다. 등 푸른 무늬가 선명한 대신 기름기가 많아 감칠맛이 덜하지만 어찌하랴.

‘안동역에서’ 노래 표지석. 안동역은 눈 내리는 겨울 이별과 기다림의 대합실로 다시 태어났다(안동시)
저 나무들이 울창해지면 강둑길은 긴 명상의 터널이 될 것이 틀림없다(안동 남후)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고 자랑하는 안동, 태극기는 이렇게 힘차게 펄럭여야 제 멋이 난다(안동 풍천)
부용대 언덕에서 내려다 본 하회마을. 옛것이 박제되지 않고 살아 있어 좋다(안동 풍천)

 

물도리동에 만든 하회(河回), 연꽃 같은 강마을
병산서원으로 가는 길은 비포장이다. 먼지가 일어나는 3.5km의 맨살이야말로 안동이 스스로 지켜낸, 과거로 가는 길이다. 화산 아래 자리 잡은 병산서원(사적260호)은 병풍 같은 산과 낙동강을 마주한 배산임수의 전형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살아남은 전국의 47개 서원중 하나이자 서원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안동유림의 갓과 상투의 힘이다.
이 날도 많은 단체관람객들이 찾아들었다. 유생들과 선비들이 강론을 하고 대화를 나누던 ‘만대루(晩對樓)’가 없는 병산서원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시원한 풍광이다. ‘만대’는 두보의 시 ‘백제성루’에서 따왔다.

翠屛宜晩對/白谷會深遊(푸른 병풍처럼 펼쳐진 산수는 늦을녘 마주 대할만하고/흰바위 골짜기는 여럿 모여 그윽히 즐기기 좋구나)

서애 류성룡의 제자 정경세가 스승을 위해 지었다니 더 감탄스럽지 아니한가. 예전에 누각에 올라 더위를 식히며 한 잠을 자기도 했던 여행자에게는 ‘낡아서 위험하니 올라가지 말라’는 안내에 아쉽기만 하다.
낙동강자전거길은 아예 병산서원을 제쳐두고 화산 뒤로 해서 하회마을로 가지만 자전거 여행을 제대로 하려면 꼭 강변길을 택해야한다. 병산서원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색하면서 갈 수 있는 3km의 싱글트랙이 기다리고 있다. 화산언저리 앞으로 하회마을에 접어드는 기분은 남다르다. 

하회마을은 한국의 얼굴이다.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배경도 씨족사회의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는 진정성이 첫째고, 조선의 건축적 경관이 둘째요, 하회별신굿과 같은 탈춤이 전승되고 있다는 점이 셋째다.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 7대손 류종혜공이 입향(入鄕)시조다. 물론 그 전에도 허씨와 안씨가 살던 마을이다. 그 후 조선 중기에 서애 류성룡을 비롯해 자손이 입신출세하며 류씨 집안은 번성하였다.
집들은 제각각 강을 향하여 좋을 대로 자리를 잡았다. 양진당을 비롯한 12개의 가옥이 보물 및 중요민속자료(122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때 350호에 달하던 마을은 이제 150여호로 줄었다. 안동이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고 자부하는 것도 수많은 서원과 종택이 반가유림(班家儒林)의 인프라로 유지되고 있기에 가능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진정 한국적인 것을 보길 원했을 때, 봉정사의 부처님과 사원건축, 하회마을의 현존, 전통한옥에서의 하룻밤을 느끼게 해드리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다. 

헛제사밥을 기어이 먹어 보리라던 기대는 무너졌다. 토·일요일이 아니면 하는 곳이 없단다. 하기야 평일에 그 많은 반찬과 탕국을 준비했다간 버리기 일쑤라니 할 말이 없다. 간고등어 백반이 그 대용이다.
화산을 주산으로 하여 낙동강이 S자로 감도는 하회마을을 제대로 보려면 나룻배를 타고 부용대로 건너가야 한다. 뱃사공은 바람이 너무 불어 운항을 못한단다. 마을사람이 운영하니 엿장사 마음대로다. 자전거야말로 배로 건너가면 천혜의 코스인데 그저 아쉬울 뿐이다.

마애솔숲유원지 소나무 숲 아래 평상이 편히 쉬고 가라고 손짓한다. 낙동강풍경소리길 가운데다(안동 풍산)
병산서원 입교당에서 내려다본 만대루. 병산과 낙동강물이 배경이 되니 인생담론이 절로 솟아 나오리라(안동 풍천)
병산서원에서 하회마을로 넘어가는 3km 싱글트랙은 걷거나 자전거여행자만이 갈 수 있는 호젓한 산길이다(안동 풍천)
낙동강에 어울리는 구담습지 근처 수중보. 이렇게라도 물을 가두지 않으면 대지는 목이 탄다(안동 풍천)

 

안동으로 옮겨 앉은 경북도청
강둑으로 올라서니 멀리 경북도청 배후도시 아파트가 보인다. 풍산읍에서 가깝지만 예천과 안동의 경계에 앉히느라 멀찍이 물러나 있다. 오래도록 끌어왔던 도청 이전은 경북북부 11개 시군에게는 명분 있는 경쟁이었지만 돈이 도는 포항·구미·경주·김천 등은 아무래도 대구와 너무 가깝거나 한쪽에 치우친 위치가 불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지보로 가는 길섶에 선 작은 안내표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말무덤’이다. 말(馬)인가 했다. 괄호안은 언총(言塚)이라 덧붙인다. 호기심으로 작은 언덕에 올라선다. 표지석마다 말에 담긴 금언이나 속담을 새긴 경구가 문신석처럼 도열해 있다. 세간의 말들을 무덤에 묻어버리고 찾아온 마을의 화평, 오늘날에도 주는 교훈이자 선현의 지혜다.

낙동강 물류의 종점, 삼강(三江) 그 흔적
자전거에서 내려 강을 건너야할 만큼 거센 바람이 막아서는 오후다. 지보로 들어가는 길손을 오래도록 지킨 풍지교는 농작물 건조장 역할만 하는 퇴물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뒷방 노인신세보다야 백배 낫다. 다리위에 말리는 지난해 참깨 대궁은 고소한 ‘지보참기름’을 만들고 난 잔해다. 초등학교 시절, 체육복 윗도리에 꼭 ‘지보’를 위에서 아래로 새긴다는 시골 면, 하지만 아무도 개명하자는 이 없으니 불가의 기운이 서린 지보암(知保庵)의 연원이 깊은 때문이리라.

강 남쪽으로 난 제방이 우망리 넌덜고개 앞에서 벼랑에 가로막힌다. 삼강으로 바로 가는 길이 없다. 내성천이 금천과 만나서 내려오다 낙동강과 만나는 삼각점, “한 배 타고 세 물 건너간다.”는 삼강이다. 낙동강 물류의 사실상 종점이다. 한양으로 가기 위해 문경고개를 넘거나 강원도로 가는 물산이 여기서 하역되었다. 마지막 주모 유옥련이 2006년 세상을 뜨고, 예천군이 현대화하여 보부상과 뱃사공들이 묵고 가는 삼강주막의 풍치는 그야말로 옛말이다. 산골짜기 길을 가는 맛도 강바람에 지친 자전거에겐 좋은 휴식이 된다. 다시 강을 반갑게 맞이하면 건너가 문경시 영순면이다.

예천군 풍양면에 대해선 할 말이 있다. 나는 풍양조씨(豊壤趙氏)다. 문경 산골짜기에 살았던 어린 시절 예천 풍양이 나의 관향인 줄 알았다. 먹고살기 바빠 타관으로 돌던 아버지에게서 그 어떤 뿌리의 내역도 들은 게 없었으니 그야말로 ‘돌 조가’였던 셈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풍양조가’라고 하면 양반이라고 추어주었다. 국사를 배우면서 풍양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일대라는 사실도 알았다. 조만영의 딸 조대비(익종 비)는 조선조 최연소 8세에 왕위에 오른 헌종의 어미로서 26세에 대왕대비가 된 비운의 여인이다. 안동김씨와의 싸움 속에 대원군 이하응의 둘째아들 고종을 왕으로 기어이 세운, 기가 센 여장부다. 사극 ‘구르미 그린 달빛’의 신정왕후다. 왕권을 등에 업은 우물 안 개구리 싸움으로 서구열강을 이 땅에 불러들여 망국을 부채질했다는 세도정치는 어찌되었건 부끄러운 역사다.
 

경천대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낙동강. 웃자란 소나무가 눈에 그슬린다. 이때 전지가 필요하다(상주 사벌)

 

자전거를 사랑하는 도시 상주, 그 아쉬움
상풍교에서 강을 건넌다. 영풍교 근처 함창 퇴강에서 합쳐진 영강과 낙동강은 이제 제대로 큰물이 되어 흘러내려 경천대에 이른다.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길은 숨을 몰아 쉴 만큼 간단치 않다. 경천대 직벽에서 내려다보는 낙동강 경치는 하회나 회룡포의 풍광과는 다르게 장쾌하다. 3층 전망대 아래 검푸른 강물의 밑그림을 가로막는 것은 소나무다. 이때 시야를 막는 나무는 과감한 절단작업을 통해 수고(樹高)를 낮춰줘야 한다. 디테일이 부족한 관청의 시각이다. 온통 엉뚱한 시설물에 돈을 들이기 전에 찬찬히 둘러보면 나올 답인데 아쉽다.

상주가 낙동강의 종주를 자처하는 것은 그럴만하다. 낙동강(洛東江)은 가락의 동쪽이라는 뜻인데 가락은 상주가 속했던 옛 이름이다. 상주시에는 낙양동이 있고, 동쪽에 낙동면이 있고, 서쪽으로는 내서면 낙서리가 있다. 낙상과 낙하도 있다. 신라에 합병된 사벌국이 사벌주가 되고, 상주는 넓은 평야의 힘으로 조선조에는 전국 8목(牧)에 들게 되었다. 삼백(쌀, 누에고치, 곶감)의 고장 상주가 인구대비 자전거보유 대수가 가장 많은 도시에 들게 된 연유는 평야지대라 자전거를 타는데 유리한 측면도 있지만 일제 때만 해도 비싼 자전거를 살 수 있는 소위 ‘돈이 도는 동네’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상주박물관’, ‘상주자전거박물관’, ‘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 ‘낙동강역사이야기관’ 등 낙동강 주변에 볼거리를 만든 노력은 각별해 보인다. 하지만 소프트웨어가 빈약하다. 낙동강은 자전거를 타고 긴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 어느 곳도 싸고 편한 숙식 공간 하나 제공하지 못한다. 그건 우리 몫이 아니라고 할지도 모른다. 머물지 못하는 여행객은 지나치고 만다. 싸구려 민박으로 눈 비비고 또 떠나야하는 먼 강둑길 여정에, 수백억을 들인 이런 시설은 장식물에 불과하다.
 

강둑길이 벼랑에 가로막혀도 산촌길로 가는 맛은 색다르다. 이제 모내기철이다(예천 풍양)
“농촌에 사람이 없다”는 말은 단순한 푸념이 아니다. 일꾼들을 모아다 주는 버스가 들판으로 가고 있다(상주 사벌)
상주자전거박물관
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
낙동강역사이야기관

 

마을의 퇴락과 흥성,  해평과 구미에서
낙단보 근처가 옛 낙동나루다. 대구 발 상주·문경·예천행 버스가 배를 타고 건너가던 나루다.    대구 팔금자동차가 미군에게서 불하받은 ‘제무시’ 엔진에다 드럼통을 두드려 만든 이른바 ‘짜깁기버스’가 사람들을 태운 채로 건너가던 나룻배의 기억이 선명하다. 

선산 도리사(桃李寺)는 신라불교 ‘도의 길’을 연 성지다. 구미시 도개면(道開面)이 언저리다. 눈 덮인 겨울 복숭아꽃과 오얏 꽃이 핀다는 의미를 지닌 절, 아도화상이 도리사에 올라 서편으로 또 하나의 절터를 가리키니 바로 김천 황악산 아래 직지사 자리란 전설도 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홀연히 스님이 되어 바랑을 메고 장터에 나타났던 옆 반 선생님이 출가한 절이 바로 도리사다. 그 이후로 목이 길고 눈썹이 짙은 김선생님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해평은 대구에서 상주로 가는 길목에 번성했던 소읍이다. 구미하이테크밸리 국가산업단지로 지정되었고, 구미가 지척이지만 퇴락한 장터 곳곳에는 옛 그림자가 남아있다. 녹물이 흘러내린 양철지붕 버스정류장, 왕자신발집, 선경스마트자전거 간판과 함께 못자리 붓듯 몰려 앉은 다방이 뭐 그리도 많은지. 작은 마을을 한 바퀴 돌며 헤아려 본다. 연·목화·부흥·그린·하늘·황금·77·88·경·선·성 다방, 반경 100m 남짓한 장터걸에 무려 11개나 된다. 유일한 위락이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차 한 잔 하는 것일까. 계란 노른자 동동 띄워주던 모닝커피 서비스도 아닐 테고…. 논두렁까지 미스김이 들고 오는 배달커피 때문인가.
구미에 들어서니 공기가 다르다. 삼성·엘지·한화를 비롯해 익숙한 이름들이 낙동강을 가운데 두고 자릴 잡고 있다. 이 나라 근대화 요람으로서의 역할은 새삼 논하지 않겠다. 금오산의 정기가 어떻게 현대사에 발현되었는지를 얘기하는 것도 부질없다.

 

이제는 퇴역한 다리 풍지교. 농작물이나 말리는 공간이 되었지만 그 구실이나 하니 얼마나 다행인가(예천 지보)
낙동강자전거길에서 간간이 만나는 언덕길은 자전거를 끌고 가며 서로를 확인하는 여유도 준다(상주 낙동)
구미에서 낙동강은 활기를 띤다. 강 건너, 천생산성 아래 구미국가산업 3단지가 든든하다(구미시)
군화와 태극기, 전쟁의 기억은 참혹하게 박제되어 있다(칠곡 석적)
호국평화탑 앞을 지나는 젊은 모자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칠곡 석적)

 

해마다 6월이 오면 아프다
자연지형을 제대로 살린 천생산성의 모습은 경부선 열차를 타고 지날 때마다 늘 궁금했다. 그 아래 남쪽으로는 웬만큼 길눈이 밝다는 내게도 생소한 석적읍이라는 신시가도 탄생했다. 칠곡은 6·25 전쟁의 참혹한 결전장이기도 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둔 이 지옥의 전투가 대구 아래 영남을 지켜냈다. 

1950년 늦여름 시산혈하(屍山血河)의 전투, 대한민국을 지켜낸 피의 무대가 여기다. 칠곡군이 호국을 소리 높여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왜관지구전적기념관’과 ‘칠곡호국평화기념관’이 낙동강을 굽어보고 있다. 칠곡보가 만들어준 물의 평화가 석양에 물비늘을 반짝인다. 멀리 옛 경부선 왜관철교의 트러스트 철골이 쓸쓸하고, 발아래로는 KTX 열차가 눈길도 주지 않고 터널로 들어가 버린다. 

해마다 6월이 오면 아프다. 동족상잔 ‘6·25동란’을 이제 ‘한국전쟁’으로 고쳐 부르는 사람들 곁에서 우울하다. 낙동강 강둑길을 달려온 다리가 천근만근이다. 

여행 만들기
낙동강자전거길은 안동댐~상풍교 구간을 제외하면 국토종주자전거길에 포함된다. 안동에서 왜관까지는 죽어라고 달리면 당일 주파는 가능하나 강둑길 여행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안동 하회마을이나 경천대, 상주보 근처의 상주박물관, 자전거박물관, 낙동강생물자원관 등을 모두 들리면서 여행하려면 1박2일을 잡아도 빠듯하다. 국토종주나 낙동강자전거길을 완주했더라도 다시 한번 해 보기 바란다. 강 건너 반대방향에서 보는 강변 풍경은 전혀 색다르다.


참고 자료
1. 한국의 발견, 경상북도, 뿌리깊은나무,1989 
2. 낙동강역사문화 탐사, 신정일, 생각의 나무, 2003
3. 하회마을, 두산백과 
4. 한국하천일람, 국토교통부, 2012

 ‌기술·용품 협찬 : 태능한성바이크(02-977-7710, 수요일 휴무)
 ‌자전거협찬 : 알톤 스트롤 전기자전거
 ‌강둑길 동행 : 이홍희(자전거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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